5.18광주민중항쟁 33주년을 맞이했습니다. 21세기대학뉴스에서는 5.18을 기억하며 당시 5월광주의 역사를 되돌아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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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우리는…
1979년 10월26일,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김재규의 저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로써 16년동안 지속됐던 박정희의 군사독재정권이 막을 내리게 된다.
이는 당시 군사독재에 신음하던 민중들에게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러나 민중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박정희사망후, 신군부는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12․12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이에 반해 재야인사와 주요야당의원들 역시 ‘계엄해제와 민주화이행’을 촉구했고, 전국의 수많은 대학생은 학원의 자주화와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들고 일어난다.
때는 바야흐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사회전반에 걸쳐 분출되던 ‘민주화의 봄’이었다.
1980년 5월10일, 23개대학대표로 구성된 전국총학생회장단은 ‘비상계엄의 즉각해제, 전두환·신현확 등 유신잔당의 퇴진’ 등을 담은 결의문을 포고하고 거리시위를 계획한다. 이런 시위를 미리 예측한 전두환중앙정보부장은 비상경계태세돌입명령을 내린다.
5월13일부터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작된 거리시위는 15일 서울역앞 집회에서 그 정점을 이뤘다. 그러나 신군부는 이를 기회로 삼아 1980년 5월17일0시를 기점으로 비상계엄령전국확대를 단행한다.
1980년 5월18일 작전명 '화려한 휴가'
시위는 서울뿐 아니라 전국에서 진행됐으며 광주에서도 전개된다. 5월14일, 전남대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을 필두로 대학가와 전남도청일대에서 거리시위가 벌어진다.
“계엄령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라는 구호와 함께 민중들은 힘껏 민주주의를 외쳤다.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다음날인 18일, 비상계엄군은 전라남도 광주의 각대학을 장악하고 학생들의 등교를 막아 세운다. 이에 학생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계엄군은 학생들을 구타하고 연행하기 시작한다.
이를 만류하려던 시민까지도 폭행을 당하자 학생들은 ‘계엄철폐’, ‘휴교령철폐’를 외치며 광주의 중심대로인 금남로를 향해 진출한다. 소식을 전해들은 시민들 역시 하나 둘 도청으로 몰려든다.
5월19일, 신군부는 11여단병력을 증파해 광주로 내려보낸다. 계엄군의 폭력진압에 분노한 시민들이 금남로에 모여들었으며, 계엄군과 투석전을 전개한다.
계엄군과 시민간의 공방이 계속되는 과정에서 조선대부속고등학교 김영찬학생이 계엄군의 총에 맞아 중상을 입는다. 전날 계엄군에게 영문도 모른 채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던 청각장애인 김경철씨(최초희생자)도 이날 사망한다.
20일이 되자 고등학교도 휴교조치에 들어간다. 카톨릭센터앞 남녀 30여명은 속옷만 입은 채로 구타를 당하고, 금남로를 중심으로 경찰과 시민들의 공방전이 계속되고, 출동한 공수부대에 의해 광주시내 곳곳에서 시민들은 잔혹하게 유혈진압당하기에 이른다.
격분한 시민들은 시청접수, 광주문화방송국방화 등 적극적인 대항을 하고 시내버스와 택시운전사들의 차량시위도 이어진다. 이로써 시위는 시가전양상으로 바뀌게 된다.
21일 시위대가 계엄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도청앞에서 도지사와 협상을 시도하지만 계엄군이 오후12시까지 퇴각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자 협상은 결렬된다.
이후 계엄군의 무차별집단발포로 인해 사상자들이 속출하고, 시위대는 계엄군에 맞서기 위해 나주, 화순 등 예비군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을 시작한다.
참된 민주주의를 외치며 시작된 시위는 이로써 무력항쟁으로 발전한다. 무장한 시민들이 모여 계엄군을 압박한 결과 계엄군을 몰아내고 광주시내를 장악한다.
계엄군이 물러가면서 광주는 해방상태가 된다. 이때를 '해방광주'라 부른다.
5월22일 도청앞에서 1차시민궐기대회가 열렸고 이날부터 시민들은 매일 오후3시와 9시, 두차례씩 도청분수대앞에서 궐기대회를 갖는다. 궐기대회에서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연설할 기회를 주고 시내치안유지방법 등을 토론한다.
광주시민들은 궐기대회를 통해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면서 질서정연하게 대열을 갖춘다. 시민들이 스스로 치안을 담당했으며, 이 기간동안 실제로 강도나 절도가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광주가 해방된 동안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언론을 동원,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하면서 광주를 고립시키고 대규모 진압작전을 준비한다.
항쟁 10일째인 27일새벽, 계엄군이 포위망을 좁혀 들어오고 도청에서는 최후의 격전이 벌어진다. 시민군은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아 투쟁했고 모두 계엄군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된다.
당시 시민군의 대변인이었던 윤상원열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며 서른살의 생을 마감한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유하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