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부르크는 정감있는 도시다. 차량이 거의 없이 전철만 다니는 아기자기한 시내에 마음이 가고 하나의 건물인듯 별개의 건물인듯 아리송하게 연결되어있는 형형색색의 건물들이 아기자기함을 더해준다. 친환경도시의 수도와 같은 곳이라 도시 자체가 깨끗한 느낌을 주고 곳곳에 보이는 자전거들에서 사람사는 냄새가 난다. 그러나 프라이부르크를 친환경마을로만 알고있기엔 도시가 지니고 있는 그 이상의 역사와 인문학적 가치가 너무나 크다. 프라이부르크에 정감이 가는 가장 큰 이유는 인문학을 품고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프라이부르크가 품고 있는 인문학의 정수를 느끼기 위해서는 프라이부르크대학만한 곳이 없을 것이다.
프라이부르크대학의 한가운데에는 작지만 중요한 광장이 있다. 바로 <백장미광장>이다. 여름에 이곳에 왔을땐 몇몇 학생들이 광장에 앉아 점심을 먹고 책을 읽고있기도 했는데 눈발이 날리는 겨울에는 광장에 나와있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적막한 광장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백장미광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소피숄의 이름이 생겨진 현판이 보인다. 백장미광장이 어떤이들을 기리기위한 곳인지 단번에 알려준다. 소피숄 그리고 오빠 한스숄. 뮌헨대학 학생들과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만든 최초의 나치 저항 단체 백장미단의 대표적인 단원들이었다. 나치에 반대하는 전단을 대학에 뿌리다 발각되어 그날 즉시 사형판결을 받고 바로 사형에 처해졌다. 당시 한스숄의 나이 26살. 소피숄의 나이 22살.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자유여 영원하리라"를 외칠 수 있는 의연함은 어디서부터 나오는걸까. 정의와 진리를 향한 불타는 열망 그리고 핍박받는 민족과 조국을 향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프라이부르크대학에는 온갖 포스터로 도배된 게시판들이 눈에 띈다. 우리나라 학생들이보면 다소 지저분해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프라이부르크대학 게시판의 포스터엔 어떠한 승인도장도 보이지 않는다. 동아리포스터 하나 붙이는데도 학생처 도장을 받으러 다니던 때가 떠오른다. 우리나라 대학에 게시물을 부착하기 위해 학교의 승인을 받아야하는 것은 유신시절 당시 학도호국단학칙의 잔재라고 한다. 학교의 미관을 위해서, 청소노동자의 편의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둔갑한 게시물 사전 승인 제도가 사실은 학생들의 자유롭고 비판적인 의사개진을 두려워한 군부독재정권의 얄팍한 술수였음을 아는 대학생이 얼마나 될까. 어떤 일이든 목적이 무엇인지가 중요하다. 프라이부르크대학의 지저분한 게시판은 학생들의 자유로운 의사교환의 장이자 학내 표현의 자유의 상징이다.
프라이부르크대학 게시판을 거쳐갔을 수없이 많은 대학생들의 외침이 들리는 것만 같다. 영원한 자유를 갈망한 숄남매의 피끓는 울부짖음도 이곳을 거쳐갔으리라. 또 진리를 탐구하는 학생들의 학문적 열정도 이곳에 묻어있을 것이다. 대학, 말 그대로 큰 학문을 하는 곳이다.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 시절 높은 취업률을 학과의 자랑거리로 이야기하던 학과장의 설명에 씁쓸해하던게 떠오른다. 진리의 상아탑이라 불리우던 대학이 언제부터 취업양성소로 전락했던가. 요새 많은 대학에서 인문계열학과를 통폐합한다고 한다. <취업양성소>가 취업이 안되는 학과를 없애는건 당연하다. 철학과가 대표적인 희생양이 되고있는 모양이다. 유럽의 유서깊은 대학은 네가지 학과가 유명하다고 한다. 법학, 의학, 신학 그리고 철학. 지금도 법대, 의대하면 <인생이 폈다>며 엄지를 치켜세우지만 철학은 어디로 간걸까. 우리대학이 대학 본연의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풀어야할 숙제가 너무나 많다.
오직 죽은 물고기만이 강물을 따라 흐른다. 숄남매를 기억하기 위해 인용되는 구절이다. 흘러가는 강물에 몸을 맡긴채 시류에 편승하여 떠내려가는 죽은 물고기가 될것인가 혹은 밀려오는 물길을 헤치며 강물을 거슬러올라가는 살아있는 연어가 될 것인가. 숄남매는 연어였다. 그중에서도 무리의 가장 앞에서 물길을 헤치는 연어였다. 나치즘의 시대, 식민의 시대를 살던 20대 청년들은 연어가 되기를 선택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백장미광장에 서서 전태일열사가 남긴 말을 생각한다. <내게 대학생 친구가 한명 있었다면>. 숄남매가 살아있다면 전태일열사의 탄식에 어떤 대답을 했을까. 지금과 숄남매가 살던 시절, 전태일 열사가 살던 시절이 과연 다른가. 청년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의 49제가 얼마전 있었다. 아직 전태일에겐 대학생친구가 필요하다.
한솔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