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을 돌아 피렌체대성당을 두눈으로 목격하는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내가 갔을때 비가 참 많이 내렸는데.. 쏟아져내리는 와중에도 발걸음을 옮기기 어려울 정도로 정말 아름다웠다. 격동의 시기 인문주의의 부활, 르네상스를 꽃피웠던 이곳은 도시가 하나의 박물관과 같았다. 미켈란젤로, 갈릴레오 갈릴레이.. 어릴 때 책에서나 봤던 천재들이 이곳에 잠들어 있었다. 

당시 유럽에서 십자군전쟁이 벌어졌다. 야만적이며 패전만 거듭한 전쟁의 결과로 교황권은 추락했고 봉건세력이 약화됐다. 이후 페스트라는 전염병이 돌았는데 이걸로 유럽에서 최대 2억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목도하며, 전쟁과 바이러스는 인류를 각성하게 했다. 그 고매하던 가톨릭사제들까지도 교회의 권위와 신앙에 대해 회의를 가졌다고 한다. 종교의 권위아래 핍박받던 사람들이 변화의 중심에 섰다. 인문학의 절정, 로마시대 이후 잃어버렸던 돔 기술의 부활은 르네상스의 신호탄으로 됐다. 

피렌체를 이야기 하려면 메디치가문을 빼놓을수 없다. 피렌체대성당, 메디치 리카르디궁, 우피치미술관 등에는 메디치가문이 남긴 족적이 가득했다. 르네상스의 아버지로 불리는 도나텔로, 브루넬레스키부터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등 르네상스거장들이 메디치가문의 후원 덕에 생계걱정을 덜고 걸작을 남겼다. 메디치가문의 전폭적인 후원은 화가, 조각가뿐 아니라 철학자, 시인, 건축가, 과학자 등 유럽 각지의 거장들을 피렌체로 끌어모았다. 인접한 공간에서 수많은 천재가 모여 수평적 유대를 형성할 때 1+1+1은 3이 아니라 100이나 1000이 될수 있다는 <메디치효과>. 이거구나 싶었다. 

당시 귀족이었던 알비치가가 금융업을 하던 메디치가에 패배했다. 피렌체의 상황과 가문의 특성은 중세기독교가 몰락하고 시민·부르주아의 힘이 강화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메디치가는 민심을 얻었고 알비치가는 그렇게 못했다. 메디치가문의 집 리카르디궁앞에는 사람들이 쉬어갈수 있는 의자가 있다. 유럽 각지의 희귀 도서와 고문서를 모아 메디치도서관을 세우기도 했다. 참고로 이 도서관은 유럽 최초의 공공도서관이었다. 메디치가가 시민들을 의식했기에 민심을 얻을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부와 권력을 독점했기에 가문의 영광은 오래갈수 없었지만, 어쨌든 메디치가가 피렌체시민의 마음을 얻고 이 지역을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발전시켰다는 것은 충분히 주목할만 하다. 

이쯤 원근법이 등장했는데, 이게 혁명이었다. 사람들의 시선, 즉 생각을 바꿔냈다. 르네상스 직전까지도 사람들은 종교에 얽매여 살았다. 모든 그림은 신에 의해, 신을 위해서만 그려졌고 화가들은 주체성 없이 그림을 그리는 장인이었을 뿐이지 그림안에 자기들의 생각을 담아낸다는건 꿈도 꿀수 없었다. 내 눈으로 본 것에 내 생각을 담아낸 그림을 시도하면서 종속적인 생각은 후퇴하게 된다. 대중들의 객관적이고 공적인 시선은 대상을 바라보는 개인의 눈과 주관적인 자아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면서 근대적인 사상을 가질수 있도록 이끌었다. 

바이러스와 전쟁으로 격동했던 14세기와 21세기가 겹쳐보인다. 코비드19와 더 복잡해진 전쟁상황은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꽃피웠듯 현대판귀족들의 몰락도, 다시한번 인간중심의 황금기가 찾아올 날이 멀지 않았다는걸 알려주는듯 했다. 르네상스의 근본정신은 인간중심이다. 혼란한 상황속에서 사람들은 인간의 가치를 주목했다. 사람들은 사람다운 것은 무엇인지, 합리적 이성에 눈을 뜨게 됐다. 중세의 종말은 예견됐다. 지금도 예견할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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