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평론가 이택광교수의 『마녀프레임』은 ‘마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의문을 차근차근 풀고 있다.
지금 우리는 안다. 마녀란 실제 존재하지 않았고 마녀는 민중을 억압하는 기제로 사용되어 왔다는 것을.
그럼에도 이 책이 궁금했던 이유는 ‘마녀’가 아니라 ‘프레임’에 방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마녀‘프레임’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 구조는 과거의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마녀사냥에 대한 분석은 지금의 우리를 분석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흥미로운 소재가 된다.
마녀사냥이 자행됐던 시기는 14세기에서 17세기까지다.
이 시기는 보통 중세시대로 분류되기 때문에 마녀사냥은 중세의 전유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마녀사냥의 시작은 14세기였을지라도 마녀사냥이 성행했던 시기는 16세기로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이다.
즉, 새로운 사회질서가 태동되는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에 마녀사냥이 성행했다는 점이고 이 마녀사냥은 민간에서만 발생한 게 아니라 전사회적으로 발생, 자행돼 왔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대를 바탕으로 마녀사냥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16세기 유럽에서는 무슨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
먼저 중세를 지배하던 기독교세계의 균열이 오고 있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겪으며 중세인들의 종교질서에 균열이 오고 그 균열을 혼란스러워 하던 시기가 바로 16세기이다.
그리고 물물교환중심이었던 농경사회가 시장과 도시의 등장으로 균열이 오고 있었다.
여기에 인쇄술의 발전을 등에 업고 근대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이성의 균열이 오고 있던 시기이다.
즉, 16세기는 사회전반에 걸쳐 균열과 혼란이 오던 시기라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혼란스러운 사회일수록 지배계급은 불안하다.
혼란스러운 사회는 지배계급의 모순이 날 것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고 그 모순에 민중은 분노하기 때문이다.
16세기가 혼란스러운 이유도 중세의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지배계급의 모순이 날 것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렇기 때문에 이런 때일수록 지배계급은 민중의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과는 약간 다르면서도 만만한 하위주체인 산파, 약제사, 마법사 등등의 여성들을 향해 그 분노의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한 마녀사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누군가가 선동하기만 하면 증거가 없음에도(증거가 없는 것은 당연한 거지만) 마녀가 되는 상황에까지 놓인다.
즉, ‘마녀프레임’은 혼란의 시기 어떤 대상을 향해 분노를 해소하는 강력한 장치로서의 역할을 한다.
마녀의 의미와 쓰임이 이렇다는 점은 누구나 마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시기 나치의 유대인학살, 그리고 지금 우리현실에서 공공연하게 접하는 ‘종북 빨갱이’에 대한 분노.
이 책에서도 언급했듯 우리 사회에서의 ‘종북’에 대한 분노는 그 언어의 비과학성에서도 느껴지듯(우리는 일제강점기 민족을 팔아먹은 친일 매국노들에게도 친일이라고 하지 종일이라고 하지 않는다) 매우 비과학적이며 감정적이다.
그리고 이 비과학적 분노는 그 집단과 ‘북’에 대한 왜곡된 두려움을 밑바탕으로 한다.
사진 : 통합진보당
마치 존재하지 않는 마녀가 초인적인 힘으로 중세 공동체적 삶을 파괴하고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든다며 마녀를 지목하고 죽였듯, 지금 우리 사회는 알 수 없는 사회문제의 탓을(이 책에서는 천안함사건을 예로 들었다) 무조건 ‘북’에 돌리고 ‘북’에 우호적인 세력을 ‘종북좌파’ 혹은 ‘종북빨갱이’로 몰아세우며 분노를 드러낸다.
그리고 이 장치는 ‘마녀사냥’을 지배계급이 이용하면서 분노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렸듯, 지금의 지배계급 또한 ‘종북’을 이용하여 자신들에게 향해야 할 분노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다.
이렇듯 ‘마녀사냥’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도 자행된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더 나아가 마녀프레임이 어떻게 작용되며 어떤 세력이 이 프레임을 작용시키는가를 모두가 직시하고 깨닫는 순간 더 이상 이 프레임은 작용하지 못할 것이고 민중은 정확한 표적을 향해 정당한 분노를 분출할 수 있을 것이다.
양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