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영화라는 거대한 장르는 보편적인 오락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무술감독과 머리를 맞대고 짠 격투장면은 무용이나 다름없다. 악당들은 주인공이 폼 나는 대사를 던질 때까지 기다려주는 매너를 겸비했고, 아무리 두들겨 맞아도 바로 일어나 다음 주먹을 피하는 주인공에게 인체 생물학은 통하지 않는다. 관람등급에 맞춰 적당히 생략한 피는 고작 얼굴에 살짝 튀어 주인공의 남성미에 정점을 찍는다. 마지막은 완벽한 승리로 장식하며, 앉아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액션영화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질주하는 놀이기구처럼 아찔하다.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게 우리 사회의 도덕이지만, 어떤 관객이 액션영화를 보며 폭력이라는 단어를 떠올릴까. 폭력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덧붙이기엔 너무나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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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류승완감독의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현실적이다. 두친구가 당구장에서 다른 무리와 패싸움을 벌인다. 먼저 달려든 석환을 말리려다 싸움에 끼어든 성빈이 순간 세게 휘두른 유리병에 한 학생이 즉사한다. 그후 엇갈리는 석환과 성빈의 관계가 영화의 중심이다. 실수에 대한 가혹한 대가를 치르고 세상에 나온 성빈은 전과자에게 만만치 않은 세상에 빠르게 굴복하고 조폭의 길을 걷는다. 출소한 성빈을 외면하며 피해 다니던 석환은 안정적인 삶을 찾아 형사가 된다. <할 줄 아는 게 몸 쓰는 것밖에 없다>는 거의 똑같은 이유로 두사람이 서로 반대되는 길을 걷는 모습은 역설적이다. 그렇기에 석환과 성빈의 관계는 경찰과 건달에서 흔히 연상되는 2분법적인 성격이나 흑백논리로 보이지 않는다. 한편 석환의 어린 동생 상환은 폭력에 대한 환상을 품고 성빈을 찾아가 조직의 일원으로 받아주길 청한다. 성빈은 석환에 대한 증오심에 상환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으며, 석환과의 마지막 싸움을 준비한다.

흔히 액션영화에서의 싸움, 그러니까 폭력은 곤경에서 벗어나는 방법이요, 사랑을 쟁취하는 수단이다. 싸움은 늘 좋은 결과를 불러온다. 그러나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현실에서 폭력의 결과가 말 그대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라는 것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 다른 패거리를 향해 뻗은 석환의 이른 주먹이 토네이도를 일으킨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되어 훗날 동생의 비참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폭력의 연쇄작용은 누군가 죽거나 혹은 죽을 만큼 나빠지기 전에 끝나지 않는다. 1막부터 4막까지 끊이지 않는 몸싸움은 내내 비명과 피, 지친 숨소리, 헛발질로 가득하다. 다른 조직과의 패싸움에 칼받이로 보내진 상환과 그 친구들이 다리가 부러져 엄마를 부르며 우는 장면이나, 쏟아지는 창자를 주워 담는 모습은 비참하다. 그것이 진실을 담고있는 것처럼 보였다. 와이어 없는 액션 연기와 블루스크린 없는 전쟁터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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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에 상영돼 큰 성공을 거두며 류승완감독의 이름을 알린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이번 17회 전주국제영화제의 폐막작으로 다시 관객들과 만났다. 이 영화로 데뷔한지 16년이 흐름 지금 류승완감독은 굵직굵직한 액션영화를 여러 개 연출한 액션전문감독이자 흥행보증수표이지만, 여전히 그의 영화에는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 빠지지 않는다. 폭력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류승완이라는 대감독이 걸어온 길과, 2000년부터 시작해 17번째를 맞은 전주국제영화제의 역사를 다시 짚어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선정이었다. 디지털 리마스터링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화질과 더불어 더 선명해진 메시지를 담고 영화제의 끝을 장식했다.  

전주국제영화제 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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