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년전 겨울, 500여명의 노동자와 경찰이 대치하고 있는 평화시장에 갑자기 화염이 치솟았다. 전신에 불길이 뒤덮인 채 사람들 앞으로 달려 나간 청년은 불이 입과 코를 태우기 전까지 구호를 외치고 또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그의 죽음은 세상을 흔들었다. 공산주의와 빨갱이의 공포에 갇혀 감히 꺼내지 못했던 <노동운동>이라는 단어가 사람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전태일의 죽음에 분노하고 슬퍼한 사람들의 잇단 투쟁과 분신이 계속됐다. 침묵이 깨지고, 금기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변화가 오늘날을 만들었지만, 전태일이 바라던 노동자의 해방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알리기 위해 분신자살한 투사라고 전태일을 정의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설명에 불과하다. 신영복교수의 말처럼 우리는 그의 죽음보다 그의 삶을 먼저 읽어야 한다. 개정된 <전태일평전>은 그의 죽음에 비해 덜 알려진 전태일의 삶과 인간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 문제이다.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 전태일 수기중
가난과 배고픔, 절망의 연속인 삶에서 인간성을 잃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삶이 괴물이 되었을 때, 그 괴물과 싸우다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전태일은 기계처럼 혹사당하며 죽어가는 노동자였으면서도 높은 이상과 사랑을 잃지 않았다. 끊임없는 부조리에 무뎌지기는커녕 점점 날카롭게 날을 벼렸다. 짧은 생각조차 할 기력이 없도록 학대하는 사회에 맞서 밤새워 공부하고 사유했다. 그리고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삶에 미련을 두지 않고, 불꽃으로 타올랐다. 그것이 <전태일 사상>이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이기 때문에, 내 삶이 빼앗기는 것에 온 힘을 다해 분노해야 한다. 저항해야 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은 <나의 전체의 일부>이기에, 타인의 고통에 같이 아파하고, 같이 투쟁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태일의 항거를 <인간선언>이라 부르고, 지지 않는 영원한 시대정신으로 기억한다.
또한 전태일은 누구보다 자유롭고 창조적인 사람이었다. 방대한 양의 수필과 소설 습작을 남긴 뛰어난 작가였다. 끝내 소원이었던 학교에 가지는 못했지만 세상을 꿰뚫어보는 그의 통찰력은 그가 남긴 수많은 글에서 예술적인 표현으로 드러난다. 그 천재성은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얻어지는 것임을 <전태일평전>은 말하고 있다. 누구든 부조리에 저항하고 인간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은 명석하다. <사랑이야말로 지식과 지혜의 원천으로서 무한한 힘을 발휘하게 해 준다.> 이것은 천재와 학력에 대해 비뚤어진 콤플렉스를 가진 우리 사회에 던지는 교훈이기도 하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이름이 있는 모든 것에는 이미 주인이 있었다. 내게 주어진 것이 너무나 적다는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을 우리는 성장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어른이 되면 부조리한 사회이지만 잘 적응해서 좀더 편한 자리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살아간다. 자유를 망각하고 비판의식을 거세당한 채, 분노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들과 허황된 표지판으로 가득한 우리 사회에는 <전태일평전>이라는 교과서가 필요하다.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전태일>이라는 작은 불꽃을 켜야 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지난 28일,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20세청년이 열차에 치어 사망했다. 처음 발생한 일도, <사고>도 아니었다. 안전보다 비용절감에 힘쓴 서울메트로에 의한 타살이었다. 그는 하청업체의 비정규직노동자였고, 두명이 해야 할 일을 홀로 해내고 있었다. 끼니를 거른 그의 가방에 들어있던 컵라면은 유품이 되었다. 비정규직청년의 죽음을 추모하는 자리에는 하얀 표지의 <전태일평전>이 놓여 있었다. 그가 분신한지 46년이 흘렀지만, 전태일의 이름은 아직도 열사로 남아있고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유언은 응답 없는 외침으로 허공을 맴돌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노동자는 죽어 사라져야 증명되는 존재이다. 마치 없었던 문제가 한 청년의 죽음으로 갑자기 생겨나기라도 한듯, 46년전 그날처럼 뒤늦은 점검과 정비가 되풀이됐다. 국민 대부분이 피고용인으로서 월급을 받으며 살아가는 노동자인 세상이다. 전태일이 밤을 새워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듯이, 우리는 질문을 멈추지 말아야한다. 한낱 소모품으로, 죽어 쓰러지면 교체되는 처지를 바꾸는 것이 불가능한 일인가? 생존과 인간성을 교환하지 않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꿈인가? 우리는 인간이 지니고 태어난 자유라는 재산을 스스로 버렸거나, 있는지도 모르는 채 살고 있지 않은가? 나를 업신여기는 현실에 동참해 스스로를 업신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민중을 억압하는 권력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해 자발적 복종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한 노동자가 자신의 비참한 노동환경을 폭로하기 위해 몸을 불살라야만 하는 세상은 슬픈 세상이다. 더 슬픈 것은, 46년이 흐른 지금은 죽음마저도 무덤덤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청년 전태일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또 다른 전태일의 헛된 죽음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저마다의 가슴속에 불씨를 지펴야 한다.
강한나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