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운동이 열기를 더해 갈수록 그들이 얼마나 견고하고 공고한 체계를 구축해 놓았는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들은 남성이자 선배이자 상사이자 곧 권력자이다.
되새겨보면 볼수록 지난날 여성이란 명사는 문자 그대로 불쌍하고 가련한 존재의 대명사로, 모욕과 천대, 멸시와 무권리의 대명사로 되어왔다. 과거 일제, 지주들의 채찍질 밑에 노예노동을 강요당하면서도 남성임금의 절반도 못되는 품삯을 받으며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물건처럼 팔려다녀야 했던 운명이 오늘날 자본가, 권력자들의 똑같은 취급에 고통받는 사회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봉건시대에 여자는 태어날 때부터 멸시받는 존재였다. 족보에서 제외되고, 남편의 얼굴조차 바로 쳐다볼 수 없고, 담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수조차 없는 처지였다. <3종지도>, <여필종부>, <7거지악>과 같은 남존여비의 관념에 눌리고, 너무나 긴세월을 눈물과 한숨속에 시들어갔다.
여전히 여자가 남자에게 무조건 복종할 것을 요구하거나, 노예적굴종을 강요하면서 여자의 인권・자유를 박탈하고 가부장제도를 옹호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이 세운 체계는 남녀할것 없이 억압을 몸에 배게 하고 일종의 집단정신병처럼 사람의 말과 행동을 제어한다. 아래로부터의 비판이 살아있었다면, 민주주의가 살아있었다면 부패권력에 의한 피해자가 말을 꺼내지도 못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들의 체계는 곧 반민주주의 체계였다.
박정희의 <허리 아래로는 묻지 말자>는 <명언>은 정치권에서 터지는 미투흐름을 한번에 설명해준다. 박정희가 군사독재와 국가보안법을 이용한 파쇼탄압으로 반민주주의 체계를 공고화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더 그렇다. 반민주주의에 편승하고 부패권력을 옹호하는 세력의 성적인 착취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심각했는지, 그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자질이나 인격, 경력에 있어서 존경받을만하다 여기던 사람들이 지나치게 평가절상돼 있었다고 드러나다보니 충격이 더 크다. 그런데 진짜 권력의 중심에 있는 자들은 미투를 피해가고 있다. 불륜판타지가 현실드라마로 드러난 마당에 영화 <내부자들>이 그려낸 판타지가 사실이 아닐 거란 확신을 누구도 할수 없다. 놀랍게도 지금 미투는 <내부자들>의 이강희(백윤식역)가 되려 큰소리치며 <위드유>를 외치는 꼴로 가고 있다. 미투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이강희가 원하는 것처럼 남녀대결의 프레임을 만들고 그 안에 눈에 보이는 먹잇감을 닥치는 대로 넣는 것일리 없다. 미투는 여성이 사회의 당당한 주인이 되어 오늘의 남성과 똑같은 자격을 갖고 권리를 행사하며 참된 인생을 꽃피워 나가길 바라는 외침이다.
처음엔 상처를 드러내는 데서 시작한다. 2016년 겨울에도 그랬다. 이제 미투는 사회의 가장 썩고 곪은 부분을 도려낼 칼을 누가 쥐고 있는가하는 반문을 던진다. 단지 상처를 드러내는 것만이 아니라 방향을 옳게 잡고 2차피해없이 봉합하며 사회변혁의 한 구성부분으로써 여성해방을 이룩하기까지, 제대로 터지는 순간을, 해방의 염원으로 하나된 순간을 민중은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다.
여성이 사랑과 존경 속에 자주적이며 행복한 삶을 누리는 세상을 꿈꾼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꾼다. 이중삼중의 억압에서 해방된 새 나라에서는 여성이 진보하는 역사의 한 축을 담당해 스스로 선택한 자기의 사명과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존재할 것이다. 선거권・피선거권 뿐만 아니라 평등한 노동・교육・의료의 권리와 결혼・이혼의 자유, 성매매제도의 철폐, 재산・토지의 소유・상속권까지 여성권리 보장을 위해 나아가야 할 길이 멀다.
21세기대학뉴스
이성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