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퀘벡의 봄'을 말한다
단결된 힘을 모아 세상을 바꾸는 것은 역사를 만드는 커다란 원동력중 하나이다. 2012년 캐나다 퀘벡(Quebec)에서 전개된 대중투쟁인 ‘퀘벡의 봄’이라 불리는 등록금투쟁이 바로 그것이다.
투쟁의 발단은 퀘벡정부 재정문제였다. 2008년 금융위기이후 퀘벡주정부는 재정적 압박을 받았다. 당시 퀘벡의 주지사였던 장 샤레스트의 자유당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긴축정책의 일환으로써 2011년초 대학에 지원하는 예산을 삭감하고 5년동안 등록금을 79% 인상하는 안을 발표하려고 시도했다.
사진출처: educationactivistnetwork.wordpress.com
실제로 복지제도가 캐나다의 다른 주에 비해 잘 정착된 퀘벡은 학생들의 등록금부담이 덜한 편이었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주정부는 다른 주들과 비교를 통해 해당법안을 통과 시키려고 했다.
퀘벡의 주요 학생조합들은 주정부의 이러한 등록금인상안에 대해 완강한 반대를 표했으며, 등록금인상이 아닌 고등교육지원을 위한 추가재원확보를 요구했다. 그중 하나인 CLASSE(교육조합연대를위한대연합)는 더 나아가 대학무상교육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퀘벡의 주정부는 경제조건악화를 이유로 등록금인상을 결정하고 정부발표를 감행한다. 실제로 자유당대표인 장 샤레스트는 2003년 취임이후 끊임없이 '사용자지불(Let the user pay)'를 외치며 이 원칙아래 국가와 사회를 운영해야한다고 주장했다.
2011년 12월부터 학생들은 대폭적인 등록금인상에 대한 투쟁을 끊임없이 준비해왔고 정부발표후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이렇게 준비된 대중투쟁의 결과는 놀라웠다. 2월13일 라발대학 사회과학대 대학생들과 대학원생들이 동맹휴업을 위한 투표를 진행했다.
이는 순식간에 퀘벡의 대학들과 일반및직업중등학교(CEGEP, General and Vocational Secondary Schools)로 확대된다. 이후 동맹휴업과 함께 학생들의 거리시위가 시작됐다.
3월25일 10만명의 CEGEP의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한다. 같은 날 도처에 31만6000여명의 학생들이 동맹휴업에 참여했다. 동맹휴업은 퀘벡에서 가장 큰 도시인 몬트리올에서 가장 강력했고, 주도인 퀘벡시에서는 보다 약하게 진행됐다.
동맹휴업에 대한 지지는 영어보다는 불어를 쓰는 이들 사이에서 훨씬 강하게 드러났는데, 이는 퀘벡의 부가 영국계 사람들에 집중돼 왔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본래 퀘벡 저소득층 가정의 젊은이들은 경제적 이유뿐 아니라 사회적 분위기에 의해 대학에 거의 가지 못했으나, 1960년대에 있었던 ‘조용한 혁명’의 승리를 통해 더 많은 계층이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이런 역사적 경험이 바탕이 되어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가 이뤄졌다.
시위의 가장 공통된 형태는 수업거부와 사람들이 건물이나 강의실로 들어가지 않도록 피켓시위를 조직하는 것이었으며, 학생들은 캠퍼스투쟁을 단행하는 한편 정부청사, 법원, 은행건물, 교량 및 다른 전략적 지점들을 봉쇄하면서 경제와 주를 교란하는 운동으로 나아갔다.
이에 주정부는 25명이상의 집회에 대한 사전신고제 및 대학시설부근의 집회금지에 관련한 주법률제78호(이후 12호로 변경)를 단행한다.
하지만 주정부의 예상과는 바르게 법률이 시행되자 학생들의 시위는 더욱 더 거세졌다. 5월22일, 학생들은 등록금인상철회 뿐만 아니라 악법철폐를 요구하는 집회를 주도인 몽레알에서 열었다. 학생들은 매일 저녁 시위에 대한 논의를 하고, 그날의 활동을 위한 슬로건과 초대장을 발부하고 전략을 구상했다. 또,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의견교류의 장으로 만들어 인쇄매체나 TV가 전달하는 소식보다 더 빠르게 시위대의 정보를 전달했다.
동시에 그들은 노래를 제작하거나, 길 한복판에서 요가수업을 하는 등의 행위예술을 통해 다양한 문화적 표현을 시위의 방법으로 사용했으며 이로 인해 동맹휴업으로 시작한 투쟁을 대중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런 다양한 형태의 투쟁이 계속되자 학생들의 투쟁은 모든 사람들의 의식속에 각인됐고 관심의 대상이 됐다.
또 몽레알의 주택가에는 밤8시마다 ‘냄비시위’로 불리는 ‘캐서롤’시위가 진행됐다. 이는 몬트리올과 퀘벡시 이웃 도시까지 번졌다. 일부 지역에서는 대중적인 총회가 진행됐다. 더불어 초반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사회적 파업’(캐나다노동법은 정치적 파업을 포함해 파업을 엄격하게 제한한다)이 78조단행 이후 연대행동에 대한 토론을 통해 일일 파업시위를 결정하게 만들어 정부를 놀라게 만들었다.
주정부는 언론을 통해 학생들을 버릇없는 자식으로 묘사하며 별것 아닌 양보안을 제공하는 등 운동을 해산시키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했지만 학생들은 이를 끊임없이 거부하며 묵묵히 투쟁을 전개했다.
계속해서 거대한 대중적 시위가 진행되자 자유당은 정치적 위기를 정면 돌파하기 위해 9월4일 조기총선을 제안한다. 그러나 이 조기총선을 통해 ‘등록금인상철회’를 구호로 내세운 퀘벡당이 제1당이 되면서 퀘벡당은 ‘등록금인상철회’를 약속함은 물론이고 학생시위 통제를 위해 단행되었던 법률 제12호를 폐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학생들은 '등록금인상계획 철회는 투쟁의 끝이 아니라 시민의 참여는 계속돼야 한다'며 '향후 무상교육을 위한 투쟁을 계속할 것'을 밝혔다.
2012년 2월13일부터 퀘벡주에서 일어났던 ‘메이플의 봄 혹은 퀘벡의 봄’이라 불리는 이 운동과정에서 총41명의 부상자와 3162명의 검거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이 운동을 통해 학생들은 등록금인상계획철회라는 목표를 쟁취해 낸 것 뿐만 아니라 퀘벡내에 산재해 있던 인종 차별, 대기업의 독과점, 이익을 위한 생태환경파괴 등의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연대도 이뤄냈다.
이런 2012년 퀘벡 학생들의 투쟁은 학생들의 풍부한 상상력과 더불어 간고한 투쟁으로 계속됐다. 이는 등록금인상저지와 더불어 교육권을 찾기 위한 강도 높은 대중투쟁으로써 퀘벡의 역사에 남을 것이다.
유하나기자
*이 글은 'transform!' 2012년 11월호에 실린 라발대학(Laval University)의 Olivier Clain, André Drainville, Gérard Duhaime, Andrée Fortin, Gilles Gagné, Sylvie Lacombe, Simon Langlois, Richard Marcoux, Daniel Mercure, Stéphanie Rousseau 등이 집필한 '퀘벡의 봄: 저항의 뿌리’라는 글을 기자가 번역,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