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영화영상동아리 <화담>회원들이 23회 부산국제영화제 현장에서 박배일감독을 만났다. 박배일감독은 지난해 2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사드배치반대투쟁에 나선 소성리할머니들을 그린 다큐멘터리영화 <소성리>로 BIFF메세나상을 수상했다. 올해는 <라스트 씬>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다.
화담은 대학내 시네필운동을 하고있다. 멀티플렉스에서 상영하는 영화보다 독립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보려고 한다. 화담은 광주에서 출발했다. 조선대화담은 광주독립영화관, 광주극장을 애용하고 있다. 감독님께서 준비하고 출품한 작품이 부산지역의 독립극장인 <국도예술관>에 관한 이야기다.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공간이다. 국도예술관이 없어지는 과정을 아카이브한 작품이다. 영화와 독립영화관, 예술영화관의 중요성을 이야기해주시기 바란다.
<라스트 씬>은 2016년에 제가 속한 오지필름과 국도예술관이 3년전부터 준비한 영화다. 다큐상영회를 정기적으로 상영하는 행사를 하고있었고, 지금도 하고있다. 상영회를 오랫동안 같이 했던 정기갑프로그래머 생일을 맞아 신년회를 연 어느날, 국도예술관이 없어질수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서 영화를 찍어보기로 했다. 감독이랍시고 같이 있으니 할수 있는 일이 영화찍는 것이다. 국도를 10년정도 다녔다. 국도회원증이 있는데 제 회원증이 유일하게 유효기간이 00.00.00이다. 평생회원증이다. 압박을 넣은 건 아닌데 어느날 그걸 주셨다. 좋아하고 애용하는 공간이었다. 제가 할수 있는게 돈으로 하는 일이 아니다.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그래서 2016년부터 조금씩 찍었다. 올 연말에 국도가 문닫을 것이라는 예상을 했다. 다들 아시다시피 건물주가 사업주와 이야기하는 듯 하더니 서로 안맞아서 나가라고 했다. 한달전 소식을 듣고난 뒤 <라스트씬>을 집중적으로 찍었다. 국도예술관과 다르지 않은 영화관들을 찾아다녔다. 한국사회의 영화관. 관객의 자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지금의 영화가 나왔다. 강력하게 영화관의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다. 갑자기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리들이 사라진다. 사라지는 공간을 보면서 각자의 자리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가 하는 이야기를 같이 할수 있다.
이번 작품이 새롭다는 느낌을 받았다. 밀양송전탑문제, 최근까지 논란이 되는 성주사드배치문제와 같은 소재를 영상으로 기록하면서 투쟁하셨다. 영화로 메세지를 전하는 일을 하셨다. 영화관과 관련된 작품을 내주셔서 인상이 깊다.
부산에서 그동안 한 일이 밀양과 성주다. 그리고 노동자의 이야기를 좀 했다. 4대강 작업도 했다. 연출을 하진 않았지만 00희망버스도 촬영했다. 그 사이에 장애인 문제를 다뤘다. 의도적으로 꾸며내듯이 하는게 아니라 한 커플을 따라가면서, 결혼과정을 이야기 하면서 그린 영화도 있다. 여성이 결혼이라는 제도권 안에 들어갈수록 침묵하게 되는 구조를 이야기했다. 이 모든 현장들은 당연히 제가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기 때문에 저의 현장이라고 생각한다. 제가 바라보는 현장의 이야기. 영화관은 저와 직접적인 이익관계가 있다. 완전 맞닿은 현장. 그 현장이 사라진다고 하니 <라스트씬>을 찍었다.
최근 <소성리>를 개봉했다. 제가 영화를 오지필름에서 만들면 가장 먼저 상영하는 곳이 국도예술관이었다. 그동안 국도예술관과 어떻게 조직할까에 대한 고민을 같이 했는데 그 공간이 없어지니, <소성리>를 어떻게 부산에 소개할까 하는 문제에서 공간이 없었다. 그게 가장 컸다. 최근 6~7년 만에 처음으로 경찰이 등장하지 않는 영화다. 악을 쓰면서 누군가를 향해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이 나오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치열한 영화다. 저의 영화적 배경 안에서 그동안의 영화들과 다르다, 결이 다르다는 말을 많이 듣지만 저에게 특별하진 않다. 현장이었다. 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 같고. 부산문화3부작을 기획하고 있고 그 첫번째 영화다.
다큐멘터리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메세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여러가지가 있는 것으로 안다. 기록영화를 시작한 계기가 궁금하다. 화담에서는 영화를 잘 보는 것에서 시작해 평론을 쓰고 넘어서 창작을 하자는 이야기도 나온다. 오지필름이 하나의 모범사례다.
제가 영화를 만든 계기, 제가 했던 영화, 어떻게 시작했는가 하면 특별한게 없다. 똑같다. 어렸을 때 부터 드라마를 좋아해서 드라마PD가 되고 싶어서 신방과를 갔다. 그런데 드라마를 만들수 없으니 드라마 한편을 뗀 단편영화를 찍었다. 친구들과. 한 친구는 촬영감독이 목표고 저는 PD가 목표였다. 영화동아리를 만들었다. 학교를 거의 안가고 밤에 알바를, 새벽 영화촬영을, 술을 먹고. 다시 학교 안가고 알바 가고, 영화 찍고 그랬다. 그래서 대학때 만든 영화가 거의 다 밤영화다. 5명이서 영화를 만들었다. 제가 영화를 연출하고 있으면 친구가 카메라, 조명, 스크립트를 맡았다. 순서는 상관이 없었다. 한 친구가 영화 감독을 맡고 있을 때면 어떤 친구가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 한 영화가 끝나면 바로 친구의 영화를 찍었다. 그래서 1년에 7편을 만들었다. 그래서 얼마나 구렸겠나. 다 불태웠다. 7편이 모든 영화제에서 다 떨어지고, 함께 영화하던 친구들이 다 가버리고.
마지막 시나리오를 써서 한 교수를 찾아갔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신방과에 영화전공하는 교수가 있었다. 그 교수를 찾아갔는데 미국에 가버려서 시나리오를 봐줄수 없었다. 그래서 찾아간 교수가 다큐를 전공한 교수였다. 시나리오를 보고 이런거 하지말고 다큐를 찍으라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제 말을 잘 듣는 사람이다. 다큐를 찍으려면 동네 미용실을 가라기에 학교 바로 옆 미용실을 가서 사전조사 하고 다큐를 찍었다.
감독님 작품들이 노동문제, 생존권문제를 다룬다. 사회운동, 학생운동 열심히 하다가 영화를 하게 된 줄 알았다.
다큐 진영 선배들이 그렇게 많이 유입된다. 서울에서도 활동하다가 영화를 좋아해서 활동을 계기로 영화를 한 친구들이 많다. 저는 그렇진 않다. 운동해본 적 없다. 농구를 열심히해서 과대표로는 많이 나갔는데. 노동운동을 했다고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큐를 찍으려고 해서 그런 것 같다. 다큐의 첫번째 만났던 주인공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공간에 있었다. 거기서 학교를 9년 다녔다. 대학 바로 옆에 고등학교가 있었다. 그러니 그 공간에서 12년을 지냈다. 맨날 술먹고 맨날 거기 있었다. 야외촬영도 전부 거기서 했다. 돈 아끼려고. 그렇게 지나다니던 공간에 가족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한번도 인식 못했다.
차상위계층, 기초생활수급 대상이 되어야 하는데 부양가족이 있어서 수급을 못받는 사람들이었다. 그걸 보고 화가 나서 사무소 찾아가서 항의하고 그랬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가 지금까지 했던 영화는 머릿속에서만 만든것이지 알고 만든게 아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영화가 당시에 700편, 800편 지금은 1200편까지 나온다. 제가 거기서 영화를 만들 이유가 없더라. 수급을 받지 못해 힘들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나서 이런 사람들한테 카메라를 들이대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을 하면 카메라를 들 이유가 있지않나하고 생각했다. 생각이 먼저였는지 영화로 작은 상을 받은게 계기가 됐는지는 모르겠다. 다큐영화를 만들어야겠다, 다큐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첫시작이 중요했다.
부산 수영에 시네마테크가 있을때 BIFF상영작을 모두 공짜로 볼 수 있는 자료실이 있었다. 거기서 다큐를 다 봤다. 공동체안에 들어가서 사회적 메세지를 던지는 것. 그러면서 다큐를 꿈꿨다. 제가 신방과를 다녔지만 다큐 수업을 들은 적이 없다. 수업을 안 나갔다. 영화는 시청자미디어센터에서 2달 24강을 듣고 배웠다. 편집수업을 하신 분이 저를 좋게 보아서 수업 끝나고 나서 우리가 <팔상필름>을 하는데 거기 들어와서 영화를 찍고 활동하자고 하셨다. 따질게 어딨나, 바로 들어가서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알고봤더니 전국에서 가장 전위적인 조직이더라. 운동을 하면서 영화를 찍는 곳이었다. 그래서 팔상필름에 작품이 없다. 운동만 한다. 현장에 들어가서 미디어 활동을 했다. 그 시기에 팔상필름은 그걸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시민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할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퍼블릭 액세스권을 쟁취하고 확산시키는 것에 주목했다.
퍼블릭 액세스권이란. KBS, MBC는 권력을 독점한다. 수신료를 받고 이익을 창출한다. 이런 매체가 공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직접 찍은 목소리도 방송하라는 법규정이 있다. 일주일에 25분이다. 외국에선 이 퍼블릭 액세스권을 더 많이 규정한다. 그걸 쟁취하기 위해 싸웠다. 그런데 이명박근혜 지나면서 다 무너졌다. 퍼블릭 액세스권 활동을 가장 열심히 한 곳이 팔상필름이다. 2008년에 촛불을 가장 많이 찍었다. 1년동안 2008년 촛불을 찍으면서 노동자와 독립언론을 배웠고, 내 주변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이렇게 싸우고 있구나, 괜찮은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구나하고 생각했다.
2008년엔 이명박정권이 들어오고 나서 FTA협상을 했는데 쇠고기 수입 조건이 있었다. 4월에 여중생들이 우리의 안전한 먹거리를 위해 FTA를 반대하고 나섰다. 광우병쇠고기라고 불렀는데, 촛불이 1년정도 타올랐다. 촛불을 적이라고 생각하고 그 적들을 키우는 사람들이 MBC라고 생각한 정권은 방송국을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KBS, MBC 간부들을 다 잘랐다. 그 자리에 이명박이 자기 사람을 세웠다. 처음은 광우병쇠고기 반대촛불로 시작했는데 그 뒤에 대운하사업이 이어져 계속됐다. 왜 잘못됐는지를 토론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토론들을 지켜보면서 많이 배웠다.
세상이 너무 많이 기울었는데, 기울어진걸 바로 세우는 사람들이 촛불에 있다. 그 사람들을 찍자고 생각했다. 그들이 누구냐라고 하면 장애인도 있고, 여성도 있고, 노동자도 있다. 제가 단순한 사람이라서 이 장애인, 여성, 노동자라는 세 주제를 드러내는 이야기를 하자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서 영화를 하자고 생각했다.
제 자랑을 하자면, 그렇게 마음먹고 지금까지 계속하기 쉽지 않다. 최근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이미 일궈놓은걸 부정하지 말자. 우연찮게 팔상필름을 만나서 사회에 대한 공부를 했다. 당시엔 질문이 많은 사람이라서 계속 질문을 했다. 그에 맞는 페이퍼를 공부하고. 그때 쌓인 여러가지가 저에게 기초가 되었다. 이번 <라스트 씬>은 9편째 장편이다. 술먹고 학교 안가고 영화찍던 그때의 경험이 손발에 힘이 되어서 지금까지 할수 있었고, 가치관의 형성은 6년동안의 활동에 있었다. 두 경험이 결합되어서 지금까지 활동한다.
감독님께서 가정적인 영향을 받으셨는지 궁금하다.
우리집은 콩가루 집안이었다. 특히 IMF이후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상상할수 없을 정도로 큰 고통을 받았다. 직장을 잃은 아버지가 할수 있는게 별로 없었다. 성격이 좋은 사람은 방구석에 박혀서 가만히 죽치고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스트레스, 화를 가정에 풀었다. 우리 아버지는 직장을 얻으러 전전했다. 부모님이 서로가 스트레스다 보니 매일 싸우고 이혼하는 환경이었는데 저는 잘 컸다. 어렸을 때를 생각하면 좋은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그런데 커서 활동하고 공부를 하면 생각이 바뀌었다. 인권감수성이 없는 사람들이 그런 일을, 불행한 사회적 배경에서 그런 일을 당했는데 가정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서 스스로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폭력을 하고 당하는 불안한 사람들이었구나. 당시 부모님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다. 배우고 영화를 찍는 저도 삶이 불안한데 그들은 얼마나 불안했겠나. 그때부터 풀렸다. 상처가 치유되지는 않았지만 관계가 나아졌다. 그러면서 생각했던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어머니가 자식을 열심히 챙기려고 했던 그 마음만 남기자.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풍성하게 무언가 하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가난해도 괜찮다는 걸 삶으로 보여준 사람들이다. 그걸 인정하자. 가난해도 풍성할수 있다는 걸 가져가려고 했다.
지금 하고 계신 작업이 있는지.
밀양 들어가기 전부터 하던게 있다. 제목은 <사상>, 저의 동네다. 그 공간이 한때는 부산지역 경제를 이끌어갔던 곳이다. 지금은 낙후된 공간이다. 변화되어야 하는 공간, 개발되어야 하는 공간으로 인식하고 그렇게 하는 단계에 있다. 옛날에는 노동자가 주체적인 무엇이었는데 지금은 계속해서 노동으로부터 밀려나고 있다. 그게 무엇 때문인가 생각해보면 자본이 이동을 해서 그렇다. 자본이 몸집을 불려가면서 이동을 한다. 관광을, 문화를, 뷰티를 중심에 세우면서 이동하면서 자기를 넓혀간다. 한때 중심에 있었지만 밀려난 사상이라는 공간에 있는 공동체를 들여다보는 작업을 하고싶다. 그리고 최근 재개발하면서 밀려나는 공동체가 있다. 공동체를 접목시키면 자본주의에 대해서 이야기 할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밀양의 세번째 이야기도 준비하고 있다. 저는 스스로 독립영화인이라고 하는데, 다큐감독이라고도 하기도 하지만 독립영화인이라고 하는 이유는 더 즐거운 제작방식이 다큐형식이기 때문이다. 손발만 맞으면 두세명이서 프로젝트를 밀고 갈수 있다. 그게 재밌어서 지금까지 다큐제작방식을 택했다. 그런데 밀양 세번째 이야기는 SF영화다. 송전탑 투쟁과 관련이 있다. 마음으로 후원 해주시면 좋겠다.
내년에는 <사상>에 집중하려고 한다. 시나리오는 주민들과 같이 쓴다. 트리트먼트는 나와있으니 거기에 맞는 시나리오를 주민들과 쓸 거다. 전체적 줄거리를 두고 거기에 맍는 디테일을 현장에서 한번 돌려보면서, 선택을 어떻게 할것인가 하는 문제를 할머니들과 토론하면서,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서 쓸 것이다. 재밌게.
저는 기록하는 사람이다. 카메라감독 앞의 주체를 어떤 사람들은 소수자, 약자라고 하는데 제 생각에는 가장 멋있고 위대하고 큰 사람들이다. 그들 때문에 평화가 오고, 핵발전소가 알려지고. 제가 아무리 영화를 만들어도 영화만은 못한다. 미디어가 다양히 발달되어 있어서 영화로 세상이 뒤집어지진 않는다. 소성리주민들, 밀양할머니들, 생탁노동자들. 이들의 투쟁 때문이 역할을 한다. 그런 사람들을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들이 세상과 맞서고 있는 것이고 연대 차원에서 기록 하는것이다. 내가 할수 있는 일일 뿐이다. 어떤 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 기록이 세상과 맞서는 것이라면, 제 카메라 앞에 있는 사람들이 더 치열하게 맞서고 있다. 제가 하는 건 별게 아니다. 매체가 가지고 있는 치열함보다 이분들이 더 치열하게 때문에.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이놈의 세상이 영화를 너무 포장하고 산업도 그렇게 만들어져서 그만큼 제가 부각될 뿐이다. 특별히 거대한 세상과 맞서있는 것도 아니다. 저라는 사람이 특별히 거대한 것 과 맞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투쟁하는 사람들 옆에 서고 싶은 시민일 뿐이다.
서있는 것도 정치다. 정치라는 말을 무겁게 생각하지 마라. 어디 서있느냐가 그 사람의 정체성이다. 가정에서 빨래하는 것도 정치다. 그걸 선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라는 것을 너무 <정치>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정치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는게 정치라고 한다면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재밌게 놀았으면 한다. 저는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삶을 산다. 가난은 제가 선택한 것이다. 반드시 가난해야 한다가 아니라, 가난한 삶을 선택했다. 그것은 굉장히 정치적인 선택이다.
정치가 탄압을 한다. 정치권이 탄압을 하는데 미친듯이 재밌게 놀면 탄압하는 세력이 더 짜증나 한다. 그런 재미들이 있으면 좋겠다. 우리 나라는 재미의 폭이 너무 좁다. 영화를 보는 재미도 좁다. 프랑스같이 문화적인 수준이 높은 나라를 가면 다 재미있다. 재미들을 넓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게 정말 정치적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면 나와 함께 할수 있게 된다. 그렇게 정치 해주시기 바란다.
프랑스에서 100만이 넘는 영화가 나오면 그 숫자를 보고 말이 안된다면서, 소외된 영화가 있을 것이라고 원인을 찾고, 소외된 영화에 지원하는 체계가 되어있다. 문화를 어떻게 만들어 놓느냐에 따라, 산업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가 나온다. 기초문화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사회적 인식 때문에 오랫동안 실천해야 하는 이야기들, 우리가 재밌어 하는건 판이 없다. 판이 벌어질 수 있도록 해야하는 이야기들을 포함하도록 재미가 넓어져야한다. 팔리는 영화를 계속 찍는 것은 문화가 획일되고 있다는 것이다. 1000만영화 공식 웃음, 감동, 눈물로 점철된 형사 이야기나 사극을 한다. 산업이 문화를 장악하고 있다는 건 그런 의미이다. 그러니 판이 계속 좁아진다. 장기적 안목에서 투쟁해야 한다.
최나라니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