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의 땅에서 

흐네보띠에(René Vautie)는 프랑스명문영화학교 리덱(L’IDHEC) 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프랑스교육동맹은 그에게 촬영을 요청했다. 1949년 21살의 청년은 서아프리카로 출발했다그는 코트디부아르가나말리부르키나파소를 다니며 자신이 본 것을 담았다. 2달로 계획한 여정은 1년이 지나서야 마무리됐다. 1릴당 3분간 찍을 수 있는 16mm필름 50릴을 채웠다

경찰은 그의 필름을 즉시 압수했다프랑스정부의 허가 없이 아프리카를 촬영하는 것 자체가 금지된 시절이었다하지만 악법이 보띠에의 앞길을 막을 수 없었다그는 기지를 발휘해 비어있는 필름을 쥐어주고 일부영상을 몰래 빼냈다. 1950년 영화 <아프리카50(Afrique 50)>은 이렇게 탄생했다단 17분의 영화였지만 파장은 컸다프랑스정부는 프랑스최초의 반식민주의영화 아프리카 50>의 위력에 놀랐다상영은 금지됐고 보띠에는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감독으로 분류됐다그에게 13건의 기소와 1년의 징역이 가해졌다

1952년 석방된 그는 즉시 알제리로 향했다. 1830년알제리침공을 다룬 영화를 시작으로 의미있는 작품들이 창작됐다그는 알제리마끼들과 함께하며 투쟁의 일상을 기록했다그들의 일상은 해방을 위한 투쟁이었다. <붉게 물든 알제리(Algérie en flammes)>는 이렇게 탄생했다

1972년 개봉한 레조헤스에서의 20(Avoir 20 as dans le Aures)>은 프랑스의 어린 징집병들이 전쟁을 겪으며 살인병기로 변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했다전쟁의 참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이 작품으로 보띠에는 깐느영화제에서 영화비평가연맹상을 받았다.깐느의 환영과 달리 정부의 탄압은 계속됐다그는 총25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다프랑스식민지인 알제리의 민족해방을 지지했다는 이유다

신념으로 빛난 삶 

보띠에는 국제주의자면서도 혁명가였다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평생 신념을 지켰다사선을 넘나드는 촬영과정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한번은 카메라가 총에 맞아 부서졌고 그 파편이 평생 그의 머리속에 박혀있었다생전에 그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보띠에는 1972년 12월 프랑스정부의 영화인정치 탄압중단을 요구하며 31일간 단식투쟁을 했다쟈 크파니젤에 대한 비자발급거부사건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파니젤은 1961년 1017일 학살을 주제로 영화를 만들었다알제리인들을 대상으로 벌어진 당시의 학살은 잔인했다목숨을 잃은 알제리인들은 센강에 버려졌다

단식투쟁의 성과로 정부는 영화검열법을 개정했다그래도 여전히 보띠에의 영화는 대부분 금지되거나 삭제됐다하지만 그는 한번도 멈춰서지 않았다생의 마지막까지 작품을 구상했다민중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진보사회에 대한 지향은 그의 생애를 관통한다.

석양의 땅에 드리운 어둠

20세기 프랑스는 군홧발로 아프리카땅을 짓밟았다지중해를 두고 프랑스와 마주한 알제리가 그 시작이었다아프리카횡단정책을 꿈꾸던 프랑스에게 석양의 땅은 대륙침략의 전략적 교두보였다프랑스이주민들은 점차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알제리를 장악했다알제리인들은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다식민화된 알제리민중의 삶은 나날이 궁핍해졌다문맹률은 40%에서 94%로 높아졌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50만명은 프랑스로 건너가 하층노동자로 일했다유럽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알제리 전체인구의 10%를 넘겼고 알제리의 비옥한 토지는 이들의 차지였다그 소득수준은 알제리인의 10배가 넘었다.

1945년 58일 프랑스가 해방됐다같은 시각 알제리에서도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수도 알제에서 270km 떨어진 세티프와 인근의 주민 1만여명이 모였다이미 일주일전 메이데이집회에서 프랑스경찰의 폭력진압으로 사상자가 발생했다도시는 분노로 들끓었다폭압적인 알제 리인사냥은 22일까지 계속됐다생존자들은 프랑스깃발아래 무릎꿇는 모욕을 당했다일부는 교수형을 선고받았다이를 기화로 식민통치는 강화됐다북아프리카연합군작전에 참여하면 해방으로 보상하겠다던 프랑스였다작전은 성공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기다리는 것으로 진정한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세티프학살은 항쟁에 불을 지폈다.

10월의 맹세

1954년 1010대전환이 시작됐다알제리수도 알제의 한마을에 6명의 청년들이 모였다경찰의 수배를 받으며 지하투쟁을 벌이던 이들은 민주주의적자유의승리를위한운동(Mouvement pour le Triomphe des Libertes Democratiques), 알제리민중당(Parti du Peuple Algerien), 특수조직(Organisation spéciale) 등에서 활동했다이들은 민족해방전선 (Front de libération nationale)을 창립하며 동시에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특수조직의 발기인중 1명이었던 아메드벤벨라를 포함한 3명은 카이로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무기를 모았다공격대상은 정부기구프랑스군대농장주 개인재산 등이었다. 400여점의 무기를 모았지만 프랑스군에 비하면 보잘 것이 없었다그마저도 대부분이 엽총이었다하지만 결정적인 투쟁 없이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일제치하 조선의 항일무장투쟁이 본보기가 됐다. 1031일 450여명의 성원들에게 조직의 지시가 내려졌다. <작전시작지침을 엄격히 준수하고 민간인을 쏘지 마라행운을 빈다.>

8년간의 투쟁

1954년 111일 프랑스이주민들이 만성절축일을 기념하던 날알제리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울렸다알제리전역에서 7개의 게릴라부대가 나섰다거리에 뿌려진 유인물에는 민족해방전선의 이름이 선명했다프랑스는 수만의 군대와 경찰을 앞세워 야수적으로 탄압했다고문폭격학살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1936년에 결성된 알제리공산당(PCA)은 1955년 당산하 해방군(CDL)을 만들었고 이듬해에 해방군은 민족해방전선에 가입했다민족해방전선에 들어간 공산당원들과 해방군은 견결하고 용감하게 지하투쟁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후에 알제리공산당의 핵심들은 민족해방전선의 진보세력과 합쳐 민주주의와사회주의를위한알제리당(PADS)을 창당했다.

민족해방전선은 게릴라작전을 이어갔다프랑스군은 이를 수수방관하지 않았다잔인한 검거·투옥이 계속됐다민족해방전선은1956년 8월 교착국면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밀작전회의를 열었다숨맘회의에서 지도자들은 알제 리혁명민족평의회와 중앙위원회를 창설했다프랑스군에 맞서 봉기해야한다는 결의도 재확인했다. 930민족해방군 3명의 여성은 수도 알제에 폭탄을 설치했다. 1957년 봄까지 매달 평균800건의 총격과 폭탄공격이 자행됐다.

프랑스군은 계속해서 병력을 늘였다후에는 추가병력확보를 위해 군복무기간까지 연장하고 예비군을 소집했다군대를 유지하는데만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다전쟁의 무대는 농촌에서 도시로 옮겨왔다수도에서 전투가 벌어지며 사상자는 연일 최고치를 넘겼다프랑스군은 헬리콥터로 잔인하게 폭격했다. 1962년 알제리해방때까지 살육의 나날이 이어졌다.

알제리민족해방투쟁에 참여하다 체포된 프랑스의 혁명적인 지성인인 앙리 알레그는 그의 저서 <고문>을 통해 당시를 증언한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후 금지된 고문도 알제리에서만은 공공연히 자행됐다알제리민족해방전선을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알제리인,프랑스인을 가리지 않았다프랑스는 자체수사본부를 꾸리고 전기고문물고문을 가했다알레그도 고문의 피해자 였다책은 발매금지목록에 올랐다하지만 이미 6만부이상이 판매되고 12만부이상 유통된 후였다책은 여러언어로 번역돼 전세계에 충격을 줬다.

동트는 새벽

무력진압을 이어갈수록 프랑스내부모순도 심화됐다4공화국은 끊임없는 파업과 경제위기를 겪었다. 1958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민족회의를 통해 알제리전쟁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도 커졌다프랑스정부는 마땅한 지도자를 찾지 못했고 공백기가 길어졌다군내부의 갈등이 가장 컸다모두의 기대를 안고 샤를드골이 재등장했다.

드골은 민족해방전선을 정당하게 대우하겠다며 용감한 자들의 평화>를 들먹였다이는 당연히 거절됐다. 1959년 9월에는 알제리의 민족자결권을 인정한다며 대안을 제시했다그리고 <알제리가 프랑스령에서 벗어난다면 참혹한 가난과 무서운 정치적 혼란대학살을 낳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1961년 1017일 저녁 파리에서 학살이 벌어졌다. <피의 화요일>이었다이날 민족해방전선프랑스연맹은 평화적인 시위를 전개했다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총을 발사했고 일부가 피살됐다시체는 그냥 센강에 버려졌다이런 학살이 사흘간이나 계속됐고 1200여명이 체포됐다.

1962년이 돼서야 드골은 알제리문제를 최대한 빠른 시일내에 해결하겠다고 성명했다. 318일 에비앙에서 알제리독립을 승인하는 협상이 체결됐다하지만 프랑스군은 끝까지 악질적이었다에비앙협정을 체결한뒤에도 프랑스의 비밀군사조직(Organisation de l'armée secrète)은 알제리에 무차별적인 폭격과 학살을 감행했다학교도서관병원 등이 파괴됐다.

1962년 75일 독립한 알제리에 혁명정부가 들어섰다독립을 위해 피흘린 사람들의 수는 셀 수가 없었다국제사회는 132년간의 지배와 예속에 무장으로 맞서 당당히 승리한 알제리에 박수를 보냈다쿠바도 그중 하나였다. 1962년 알제리임시정부대표는 체게바라와 피델카스트로를 만났다독립한 뒤에는 쿠바와 외교관계를 수립했다이듬해 쿠바는 알제리에 군사와 의료 분야의 지원을 시작했다. 1000여명의 의사들이 알제리의 보건분야에서 일하게 됐다.

세계각국에서 벌어진 거센 반제투쟁은 민중들을 의식화시켰다보수세력의 지지율은 하락했다제국주의와 식민지간의 지배·예속의 모순을 자각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자각은 실천으로 이어졌다그리고 이른바 <68혁명>이 터졌다프랑스좌·우세력 모두가 드골에게 등을 돌렸다드골은 민중들의 신임이 없다면 사임할 것이라는 말 그대로 1969년에 물러났다알제리전쟁의 정치위기로 등장한 드골은 알제리독립을 승인하며 퇴장했다불굴의 민중조직된 민중은 승리했다.


제1회 메이데이국제축전(MIF)

4.25목  
1400-1700 <레조헤스>·아프리카50> 관객과의 대화 / 인디스페이스상영관 
1830-2230 졸리몸공연 / 대학로<알과핵> 소극장

4.26금 
1530-1830 <알제리전투> 관객과의 대화 / 인디스페이스상영관
1900-2230 <그헝퓌와 작은승리, 파리코뮌에서 인민전선까지 총파업역사> 관객과의 대화 / 인디스페이스상영관 
1830-2230 졸리몸공연 / 대학로 <알과핵> 소극장

4.27토
1200-1450 <파업전야> 관객과의 대화 / 인디스페이스상영관
1520-1900 <아름다운청년전태일> 관객과의 대화 / 인디스페이스상영관
1930-2200 <라쏘시엘> 관객과의 대화 / 인디스페이스상영관
1200-1730 코리아국제포럼1 <노동민생경제> / 서울도심
1830-2230 졸리몸공연 / 대학로 <알과핵> 소극장

4.28일
1630-1900 <위로공단> 관객과의 대화 / 인디스페이스상영관
1930-2200 <하워드진의 미국민중사> 관객과의 대화 / 인디스페이스상영관
1200-1800 코리아국제포럼2 <노동자가 보는 평화통일> / 서울도심
1830-1930 졸리몸공연 / 홍대앞

4.29월 
1200-1800 코리아국제포럼3 <세계노총과 장기투쟁노조가 함께하는 국제컨퍼런스> / 서울도심

4.30화 
1830-2230 메이데이전야제 졸리몸 희망새 동해누리 / 세종문화회관중앙계단 

5.1수 

메이데이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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