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비에아잠(Olivier Azam) 판게아의저항자들(뮈땅드뻥졔)대표, 영화감독
알제리의 민족해방을 위해 투쟁한 흐네보띠에에 대해
흐네보띠에는 1945년부터 생의 마지막까지 영화를 통해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그가 출연하거나 관여한 영화만 180개가 넘는다. 16세에는 레지스탕스활동을 해 훈장도 받았다. 흐네보띠에는 총을 들고 싸우고 싶었지만 주변에서 막았다. 그의 옆에는 시를 쓰고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정치적이면서 예술적으로도 민감했다.
흐네보띠에는 영화학교에 다녔는데 매우 주목받는 학생이었다. 물론 영화계에서도 그랬다. 1948년에는 루이다캥이 감독한 <광산노동자들의 대투쟁(La Grande Lutte Des Mineurs)>을 촬영했다. 광산노동자들의 투쟁을 담은 영화다. 21살에는 프랑스에 존재하는 최초의 반식민지영화 <아프리카 50>을 만들었다.
사실 그 영화는 번외였다. 다른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갔는데 혼자 조용히 만들었다. 영화는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금지됐다. 흐네보띠에는 영화를 살리기 위해 싸웠다. 이 과정들은 투쟁 그 자체였다. 그가 만든 90%이상의 영화가 직접적으로 금지되거나 삭제됐다.프랑스가 알제리를 학살하는 동안 그는 알제리민족해방을 위해 싸웠고 시대를 증언했다. 프랑스의 반식 민주의·반제국주의운동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 프랑스정부는 그를 조국을 배신한 반역자로 매도했지만 굴함없이 독립성을 유지했다. 그는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흐 네보띠에는 전투에서 동료를 잃고 눈물을 흘리는 알제리인의 모습을 담았다. 민족해방전선의 책임자는 이 장면 때문에 배포를 금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떻게 군인이 우는 모습을 보이는가하는 문제였다. 흐네보띠에는 이즈음에 튀니지감옥에 수감됐는데 그곳에서 탈출한 그는 민 족해방전선이 틀렸다는것을 말하기 위해 알제리로 갔다.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가야 한다고 설득했다. 지치지 않는 투쟁이었다. 그는 이런 식으로 평생을 살았다. 계속 부딪혔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흐네보띠에가 <아프리카 50>을 제작하던 과정은 어떠했나
그는 언제나 불가능한 영화를 만들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했다. 21살에는 자신이 만든 영화 <아프리카 50> 때문에 구속이 됐다.그가 아프리카로 떠날 때 이미 미행이 붙었다. 1951년 그는 미행을 떼려고 아프리카국경을 넘었다. 촬영이 끝난 뒤에는 배를 타고 고향인 브흐따뉴로 돌아왔다. 그는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환자처럼 붕대를 감았다. 그안에는 중요자료가 숨겨져있었다. 촬영된 영상은 프랑스에서 편집됐다. 그의 어머니가 파리 근교에서 교사로 일했는데 거기서 바늘로 영상을 편집했 다. 장비도 변변치 않았다. 어머니와 작업할 때 경찰이 들이닥쳐 구속됐다. 영화필름들이 있는데 경찰에서 그를 불렀다. 그의 담력이 얼마나 대단했냐면 영상을 틀어달라고 요구한 뒤 설명을 시작했다. 그 사이에 영화필름을 빈필름으로 바꿨다. 필름을 빼돌려 영화를 구했다. <아프리카 50>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영화가 짧은 이유다. 한 코미디언은 탄압이 무서워 나레이션을 거절했다. 그래서 흐네보띠에가 직접 맡았다. 영화는 나오면서부터 공개될 수 없었다. 미테랑이 집권하던 1990년대 프랑스정부는 아프리카의 프랑스대사관에서 영화를 상영할 것을 제안했다.비자를 발급해주겠다며 꼬드겼지만 흐네보띠에는 거부했다. 1990년대에 영화가 나올 수 있었지만 그가 거절했다. 공식적으로 영화가 세상에 나온 것은 2014년,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전이다. 그전까지는 비공식적으로만 상영됐다.
알제리가 해방된 뒤 흐네보띠에의 활동이 인상적이다
해방된 알제리의 영화산업을 만들었다. 알제리영화의 아버지인 셈이다. 해방된 알제리는 투쟁의 현장이었다. 미국의 블랙팬써당, 쿠바의 체게바라를 비롯해 전세계의 투쟁가들이 알제리에 왔다. 흐네보띠에는 남아공화국을 다룬 영화를 만들고 1970년대가 돼서야 프랑스로 돌아왔다. <레조헤스에서의 20년(Avoir 20 as dans dansle Aures)>이라는 중요한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는 알제리전쟁에 참가한 프랑스인들의 증언을 담았다. 어떤 식으로 고문했는지, 전쟁이 사람을 얼마나 야만적으로 만드는지. 전쟁이 끝난지 딱 10년후였다. 알제리에 대해 이렇게 직접적으로 만든 영화는 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영화는 1972년 깐느영화제에 출품됐고 아주 인상적인 평가를 받았다. 1961년 센강변에서 알제리인들이 학살됐다. 쟈크파니젤은 10월의 학살을 카메라에 담았다. 알제리전쟁후 알제리는 프랑스로부터 독립했다. 알제리에 대한 이야기는 괜찮았지만 그이상은 아니었다. 프랑스인의 학살을 담은 영화는 당연히 금지됐다.흐네보띠에는 영화를 지지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갔다. 이 영화가 금지된 것을 본 그는 단식투쟁을 벌였다. 많은 영화인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있다. 흐네보띠에의 단식투쟁으로 영화에 대한 제재가 풀렸다. 나중에 그가 증언하길 프랑스정부에서 자신을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68혁명도 지났고 언론산업에 대한 검열이 심해서는 안된다. 당신이 이겼다. 그렇다고 당신이 원하는걸 만드는게 쉬워진다는 뜻은 아니다. 정치적 탄압이 아니라 경제적 탄압을 할 것 이기 때문이다.>
흐네보띠에의 생애 마지막시기를 함께했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집중한 영화나 사안은
맞다. 마지막 10년을 함께했다. 흐네보띠에는 2015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말년에 영화산업에 대한 탄압을 표현하고싶어했다. 그는 영화를 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흐네보띠에를 다룬 영화중에는 그의 딸이 만든 것도 있다. 우리는 그 영화를 개봉할 계획도 갖고있다. 1970년대에 있은 투쟁을 담은 영화다. 2000년대에 흐네보띠에가 이른바 <좌파>들에 의해 비판받은 적이 있다. 그는 마지막순간까지 이데올로기의 잣대로 인한 비난과 끝까지 투쟁한 사람이다. 내가 명확히 얘기할 수 있는 건데 가장 많은 탄압을 받은 영화인이 그다.
흐네보띠에의 생애와 그 영화를 정리해 말하면
진보주의자였다. 진정한 진보주의자였다. 그 얘기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예술가였고 시인이었으며 영화인이었다. 한마디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나는 그런 능력이 없다. 정치활동을 하는 많은 예술가들은 주제를 정치적으로만 축소해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흐네보띠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영화는 내용과 형식이 훌륭하다. 정말 영화천재다. 예술성도 대단하다. 진정한 영화인이 맞다. 영화자체의 성격을 잘 담아내면서 내용은 진보적이다. 그를 통해 배우는 것이 많다. 영화를 만들다가 일정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공개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에게서 배웠다. 그의 예술성이 가득한 영화가 관료화된 권력의 폄하에 평가절하되는 경우가 많다. 아마추어라는 한마디로 왜곡된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 전문영화인보다 더 제대로된 영화를 만드는게 우리다. 신념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내가 평생을 살아도 그의 무릎정도나 갈 수 있을까싶다. 그는 사회참여영화를 만든 사람인데 나는 아직 시작도 못했다. 그 경지에도 이르지 못했다. 그는 진정한 진보주의자로서 노동계급진보정당의 당원이었지만 그 한계와 틀에 갇히지 않았다. 프랑스제국주의에 맞서 알제리민족해방에 기여하며 그 과정을 특색있게 영화에 담았다. 창작의 원 리와 방법에서 혁신적이었다. 내용을 담아내는 형식에서 창조적이었다. 그가 주는 가르침은 너무 많다.
제1회 메이데이국제축전(MIF)4.25목1400-1700 <레조헤스>·<아프리카50> 관객과의 대화 / 인디스페이스상영관1830-2230 졸리몸공연 / 대학로<알과핵> 소극장4.26금1530-1830 <알제리전투> 관객과의 대화 / 인디스페이스상영관1900-2230 <그헝퓌와 작은승리, 파리코뮌에서 인민전선까지 총파업역사> 관객과의 대화 / 인디스페이스상영관1830-2230 졸리몸공연 / 대학로 <알과핵> 소극장4.27토1200-1450 <파업전야> 관객과의 대화 / 인디스페이스상영관1520-1900 <아름다운청년전태일> 관객과의 대화 / 인디스페이스상영관1930-2200 <라쏘시엘> 관객과의 대화 / 인디스페이스상영관1200-1730 코리아국제포럼1 <노동민생경제> / 서울도심1830-2230 졸리몸공연 / 대학로 <알과핵> 소극장4.28일1630-1900 <위로공단> 관객과의 대화 / 인디스페이스상영관1930-2200 <하워드진의 미국민중사> 관객과의 대화 / 인디스페이스상영관1200-1800 코리아국제포럼2 <노동자가 보는 평화통일> / 서울도심1830-1930 졸리몸공연 / 홍대앞4.29월1200-1800 코리아국제포럼3 <세계노총과 장기투쟁노조가 함께하는 국제컨퍼런스> / 서울도심4.30화1830-2230 메이데이전야제 졸리몸 희망새 동해누리 / 세종문화회관중앙계단5.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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