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이번 '5.18광주민중항쟁' 왜곡 등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가 도를 넘어도 한참 넘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일베의 등장부터 5.18역사왜곡까지 이를 분석한 기고를 연재한다.


① 이명박5년 … 그리고 파쇼들의 등장

② 데카르트로 일베 보기 

③ 일베에 대한 단상 ... '너 일베충이니?'를 보고  

④ 5.18, 그리고 의북증?


1. 이명박의 탄생


2007년쯤이었나, 한국경제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대선을 앞두고, 한국경제를 어떻게 살릴 것인지 논쟁이 분분했다. 좌파들은 그때 노무현을 강도높게 비판하고 있었다. 노무현은 진퇴양난이었다. 왼쪽에서는 좌파의 비난에 직면했고, 오른쪽에서는 우파들의 물어뜯기를 마주하고 있었다.


좌파들에게 노무현의 기억은 끔찍했다. 낭자한 선혈, 굳이 표현하자면 지옥도 정도 될까? 노무현의 시위탄압은 그야말로 워싱턴컨센서스의 복제판이었다. 강도 높은 시위탄압은 영국의 그 옛날 광부노동자탄압을 떠올릴만 했다. 사람들은 노무현에게 실망했다. 그리고 더욱 더 냉소로 돌아섰다. 소위 '진보정권'(좌파들은 결코 인정하지 않지만)이라 불리던 정권, 개혁을 해줄 것이라 믿었던 정권은 철저히 사람들을 배신했다.


이명박의 실용주의, 탈정치노선은 이런 면에서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었다. 기성 정치의 '병신스러움'에 신물난 사람들은, 이명박의 냉소에 가까운 정치관 - 탈정치이데올로기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보수·진보의 대결이 아니라, 이념을 배제한 채 '실용'을 내세우는 정부. 냉소주의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여기에 이명박이 서울시장에 있으면서 보여준 몇몇 실적은 그에게 후광을 더했다.


이명박은 노무현을 철저히 짓밟았다. 그는 노무현을 '실패한 정부'라 단정지었다. 뉴라이트를 비롯한 우익세력은 '잃어버린 10년'을 외쳤다. 이명박은 이들을 등에 업었다. 그리고, 노무현을 지지한 수많은 사람들의 표를 쓸어갔다.


이명박은 철저히 노무현이 탄생시킨 인물이었다. 그것은 결코 상관관계로 정의될 수 없다. 매우 분명하게 인과적인 산물이었다. 노무현의 과는 너무도 명백했고, 사람들은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를 외치며 이명박을 선택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명박에게 짊어진 정치적 압박은 거셌다. 대운하논란, 그리고 반값등록금논란, 더불어 숱한 말바꾸기까지. 이명박은 탄생부터 굉장히 이중적인 존재였다. 한편에서는 기대를, 다른 한편에서는 비난을 안고, 이명박정권은 출발했다. 흡사, '누란지위'라는 표현이 적합할만큼, 이명박이 보여주는 이념적 좌표는 그의 미래를 알려주는 지표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명박정권은 탄생초기부터 그의 미래를 미리 예고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제시한 것은 미래비전이 아니었다. '경제살리기'라는 당면과제뿐이었다. 이명박의 배신은 어쩌면 미리 예고된 것이었을는지 모른다.


2. 이명박에게 던져진 첫번째관문


경제를 살릴 것이란 기대, 정확히는 대중의 왜곡된 욕심이 반영된 기대를 받기는 했지만 이명박에게 주어진 과제는 그야말로 난제중의 난제였다. '경제살리기'라는 그의 모토는 그의 목줄을 죄었다. 이미 김대중·노무현을 거쳐 한국에 고착화된 신자유주의라는 괴물 같은 시스템을 타개할 능력도, 의지도 이명박에게는 없었다. 그에게는 신자유주의를 밀어부치는 것, 그 이상의 대안은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그의 첫번째 관문은 FTA였다. 노무현정권부터 추진돼 온 FTA를 마무리해야만 했다. 노무현정권에서 사용됐던 논리는 그대로 이명박정권에게 이월됐다. “시대적 흐름이다!” 이명박은 실용주의라는 말에 걸맞게, 철저히 현실적 '하지만 매우 많이 왜곡된 현실' 자세로 협상에 임했다. 


FTA협상은 난항을 거듭했다. 그러던중, 광우병논란이 터져나왔다. 대중의 불만은 급격히 폭발하기 시작했다. 비록, 한편에서는 경제살리기라는 모토로 사람들의 기대를 받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뉴라이트를 등에 업은 정치적 입지가 그를 옥죄고 있던 차, 광우병논란은 급격히 퍼져나갔다. 정권초기부터 불통논란과 말바꾸기 등 신뢰도의 문제로 인해 대중의 기대는 빠르게 불만으로 변해갔고, 놀라운 속도로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대중의 쌓인 불만은 차곡차곡 누적돼 갔다. 한편에선, 친노세력이 부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노무현을 짓밟고 태어난 이명박, 친노세력의 부활 명분은 충분했다.


FTA를 그대로 추진한다는 것은, 배신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제까지 수없이 쏟아져 나온 신자유주의비판론은 이명박앞에서는 효력이 없었다. '국익'이라는 명분 하나면 모든 것이 정당화됐다. 이명박에게 '경제살리기'의 주체는 국민이 아니었다. 그의 주체는 국가였다. 국민보다 위에 선 국가! 대중은 폭발했다.


갈수록 불어나는 투쟁의 열기, 500만여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고 이제 대중의 관심사는 FTA, 광우병이 아니었다. 언론통제와 신자유주의시스템까지 문제삼기 시작했다. 대중의 호응은 폭발적이었다. 사람들은 낙하산인사를 비롯해 이명박정권의 곳곳을 찔러댔다. 정권의 부패일지는 나날이 업데이트 되고 있었다. 대중의 반응은 실로 놀랍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이명박에게 대중의 불만을 수렴할 여지는 없었다. 그가 선택한 것은 탄압이었다. 이른바 '명박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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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avaqquq.wordpress.com


경찰력을 동원한 이명박의 시위대탄압에 조중동을 비롯한 언론들의 소위 '불법시위'니, '폭력시위'니 하는 딱지 붙이기와 '배후설'이 덧붙여졌다. 대중은 더이상 주체가 아니었다. 누군가에 의해 선동된 객체일 뿐이었다.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하는 사람들! 촘스키의 이데올로기통제론을 그들은 이상하게 적용하기 시작했다. 촘스키가 보면 뭐라고 웃을지 궁금할만큼 이들의 기괴한 논리들이 연일 신문지면을 장식했다. 아! 우매한 대중이여! 그대들은 어찌하여 조종 당하느냐! 국가가 그대들을 올바르게 인도할지니!


투쟁은 패배했다. 촛불은 더이상 조직되지 않았다. 아니, 그들 스스로 조직되기를 거부했다. 좌파들은 2008년 촛불에서 힘도 제대로 못 쓰고 의제세팅에서 거의 친노들에게 끌려다녔다. 친노들은 대중을 매우 효과적으로 추수했다. 이명박에 대한 반감이 낳은 노무현의 향수를 추수했고, 그로 인해 노무현의 과오를 정당화하는 코미디마저 저질렀다. 우익세력이 국익론을 들고 나오자 친노들도 덩달아 국익론과 더불어 애국론까지 들먹이곤 했다. 트위터상에는 소위 '애국진보'라는 이름의 계정명이 난무했다.


투쟁의 패배로 인해 우익들은 더욱더 기고만장해졌다. 10년만에 되찾은 정권, 거기에 거센 대중의 저항까지 억누르는데 성공했다! 이제 우리를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정말 말그대로, 우익들의 앞길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장의 지배자, 우익님들! 


3. 대중의 정치적 소외 ... 국가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2008년도 촛불이 보여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여전히 수많은 우익세력이 주장하듯, 광우병은 진실이 아닐 수도, 혹은 진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08년도 촛불이 보여준 것은 검역주권이니, 광우병의 창발률이니 하는 지엽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철저히 정치적 배신이었고, 노무현의 지옥 같았던 체제를 그대로 이어가겠다는 이명박의 의지를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대중은 정치적으로 소외됐다. 대의민주주의는 위기를 맞이했다. 링컨이 그랬던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 그러나 이명박정부의 그것은 달랐다. '국가의, 국가에 의한, 국가를 위한 정부'였다.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이명박정부에게 있어 주체는 People이 아닌 Nation이었다. 시종일관, 이명박의 입에서 나오는 발언은 '국격'이라느니, '국익'이니 하는 말이었다.


주체가 국가로 설정된 이상, 그속에 속한 구성원인 국민은 객체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객체가 되어버린 국민은 주체속에 하나로 일원화되곤 한다. 소위 '배후설'의 망상은 여기에서 나오곤 한다. '전체'를 누군가가 망가뜨리고 있다는 환상. 지젝의 일침은 여기에서 유효하다. '사회는 이미, 언제나 분열돼 있다'


객체가 돼 버린 대중은 정치에서 철저히 소외됐다. 이명박정부식 소통 – 소위 '명박산성'으로 드러난 소통의 부재. 가장 온건한 자유주의 논객들조차 이명박의 그러한 불통을 지적하곤 했다. 권위주의로의 회귀 – 그리고 이어지는 부패스캔들. 이명박식 '업적치하'는 흡사 용비어천가를 연상케 하기에 충분했다.


소외된 대중이 선택한 것은 투쟁이었다. 정부의 불통으로 시위대는 한발자국 후퇴했다. '우리도 애국자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전경과 물대포였다. 국가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이명박의 “국익론”은 그야말로 요술봉이었다. “국가를 위한 것이다!” 국가를 위하는 것이, 곧 국민을 위하는 것이라는 소리다. 그러나, 이명박이 보여준 “국민을 위하는” 정치는 잔혹한 탄압이었다.


대표적인 사건을 고르라면, 2009년도 쌍용차사건이다. 77일간의 지난한 투쟁속에, '함께 살자!'라는 구호에 맞서 이명박이 선택한 것은 테이저건과 최루액과 고무총탄이었다. 경찰의 뻔뻔한 변명 '최루액은 인체에 무해하다!'는 철저히 비호됐고, 노동자들의 응대는 '폭력시위'라고 조명됐다. 조현오는 청문회에서 뻔뻔하게 대답한다. “테이저건을 쐈으나 빗맞았다!”


대중은 이렇듯 철저히 정치적으로 소외됐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낙인과 비난이었다. 왜? 국가에 저항했으므로.


이명박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의 군홧발은 거침없었다. 자신들의 투쟁이 전혀 효과가 없음을 인식한 대중은 투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새로운 세력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4. 또하나의 이데올로기 '탈정치의 정치'


이명박은 재임기간내내, 자신을 '실용주의'라고 강조하며 자신의 탈정치성, 좌파와 우파를 떠난 제3의입장(이라는 환상)을 표명하곤 했다. 자신은 이념을 떠나 실용을 추구하는 사람이란다. 


과연 그랬을까? 이명박은 이념을 떠나 자유로운 탈정치의 인물이었을까? 아쉽게도 경험적으로 보나 논리적으로 보나 이명박은 이념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좁게 보면, 그의 실용주의 또한 하나의 강력한 이데올로기였다. 무엇의 실용? 국가의 실용. 이명박자신은 이념대립을 비판하며 탈정치를 이야기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명박은 실용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셋팅함으로써 이념대립에 뛰어들었다. 우습게도, 그의 실용주의이데올로기는 소위 '국익론'과 맞물림과 동시에 무서운 힘을 발휘했다. 국익을 위하는 것이 가장 실용적인 것이다 – 좀 거칠게 해석하자면 이런 말이 되겠다. 아니, 이명박 재임5년내내 적용된 논리가 바로 그랬다.


이명박이 노조를 대하는 태도를 보라! 이명박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귀족노조가 파업하는 나라는 대한민국뿐' 어쩌구저쩌구.


다음은 당시 한겨레기사의 일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이명박대통령은 19일 “고소득노조가 파업을 하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고 최근 파업에 돌입한 현대차노조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제128차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온세계가 당면한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고소득노조의 파업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 대통령은 부분파업에 돌입한 현대차노조를 언급한 뒤 “정말 어려운 계층은 파업도 못한다”고 꼬집었다.


앞서 현대차노조는 비정규직 정규직전환 등에 대한 사측과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13일오후1시부터 부분파업에 돌입했다.


이 대통령은 이어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며 “기업에 대한 지나친 제재는 기업의 투자심리를 위축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어려운 때일수록 기업이 활기를 띠고, 사기충천해 잘 해보자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우와.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을까? 이명박의 언어를 뜯어보면, 기업, 즉 자본가의 이익은 굉장히 보편적인 것으로 세팅돼 있다. 그에 맞서는 노동자계급의 이익은 철두철미하게 특수한 것으로 치부됐다. 


단지 경제가 어려우므로, 자본가의 주머니를 채워주기 위해 노동계급은 자신의 호주머니를 비워야 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이렇다. 이게 이명박식언어다. 이게 이명박이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다. 뻔뻔스럽기 그지 없다. 자본가를 위해 어째서 노동자들이 희생을 해야 하는가? 자본가–노동자라는 특수한 이익의 대립에 국가라는 상징계가 덮히니 순식간에 자본가의 이익은 보편적 이익으로 둔갑하고, 노동자들의 이익은 특수한 것으로 치부됐다.


이런 점에서 이명박은 결코 탈정치적 인물은 아니었다. 그의 어젠다 '실용주의'라는 노선은 종래의 이념 대립과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었지만, 그것은 결국 또다른 우익 세력의 양산을 뜻했다. 이명박은, 실용주의라는 탈이데올로기노선과는 다르게 철저하게 우익이었다.


탈정치를 살고 싶었으나, 결국 가장 정치적인 인물. 좀 관대하게 평가해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구라치다 걸리면 피보는 거 안 배웠니?'


5. 역사의 반동, 파시스트의 탄생


아마 제목을 보자마자 여러분이 떠오르는 단어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일베'다. 2008년도 촛불이 패배로 돌아간 후, 우익세력에게 촛불을 비롯한 일종의 왼쪽으로의 흐름은 전체주의로 규정됐다. 이제 우익세력은 스스로 변신을 한다. 군사독재를 지나, 그것을 소극적으로나마 옹호·지지해온 우익세력은 이제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로 색칠하게 된다. 전체주의에 맞서는 자유주의자들! '뉴데일리'라는 언론사의 등장은 우익세력의 이념 좌표, 정확히는 뉴라이트의 쓰레기 같은 자아도취를 볼 수 있다.


저항적 세력은 하나의 분열세력으로 낙인찍혔다. 이명박정권내내 기승을 부린 '종북' 사냥은 비단 주사파멍청이들만을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저항적 세력,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싹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들에게 '종북'이라는 굴레를 씌우기는 너무나도 쉬웠다. 그저 북한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만 증명해내면(그것이 억지일지라도) 순식간에 줄줄이 굴비마냥 종북세력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몇가지사례를 보면, 국가보훈처에서 쌍용차노동자들을 향해 '종북세력'이라 교육하는 자료를 냈다. 또, 사회당당원이었던 박정근이 북한의 '우리민족끼리' 트위터를 '리트윗했다는 혐의(사실 조롱하기 위한 목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로 종북주의자로 몰려 국보법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박정근뿐만이 아니었다. 권용석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베는 바로 이런 우익세력의 담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소위 '팩트'를 중시한다며 일종의 포스트모던의 한 부분을 차용하고, 그들은 촛불과 저항자들을 향해 맹렬히 비난했다. 그러나 이들은 한가지 중대한 오류를 저지르고 있었다. 그들은 국가 – 법치 따위의 체제적 비판에 대해서는 유능함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 그들은 촛불의 어떤 전체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스스로를 자유주의자인 양 위장했지만, 정작 그 촛불을 비판하는 논점은 국가주의아래에 묶여 있었다. '국가혼란'이라느니 '국가적 위기'라느니 별 괴상한 언어를 동원하면서까지 말이다. 


이들은 갈수록 국가주의에 경도됐다. 이들에게 ‘안보’라는 의제는 이미 합리성의 영역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정치적 언어로 바뀌었다. 또, 스스로를 계몽자의 위치에 놓음으로써 자신들을 정당화했다.(소위 ‘산업화’라는 것은 이들의 이런 계몽적 지위를 알려주는 것이다)


이들에게 더이상 도덕적 금기는 없었다. 능욕을 비롯해, 온갖 혐오와 더불어 쓰레기 같은 파쇼적 정치언어를 '즐겼다'. 여성혐오는 이들의 주된 안주거리였고, 아류인종주의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 지역혐오는 이들의 놀이였다.


파시스트들은 그렇게 '유머'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을 위장하며 정치전선에 등장했다. 정치적 테러리즘(산업화)은 계몽의 이름으로 정당화됐다. 이들의 백골단을 연상케 하는 완장질은 '좀비사냥'이라는 하나의 하위놀이문화로 형성됐다. 이런 종류의 전체주의자들이 생겼다는 것은, 기실 그것이 이명박만의 잘못은 아닐지라도 그만큼 한국 사회의 어떤 갈등구도에 있어 중간자적 존재가 없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현실이 그랬다. 이명박은 철저히 '자본가계급'의 정치를 했던 것이다!


파쇼들의 등장은 어쩌면 예상됐던 일일수도 있다. 이명박의 이념적 좌표는 정확히 파쇼들의 등장을 알려주고 있었다.


최태준(인천대)

*기고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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