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5일 전국 35곳에서 노동자‧농민‧청년‧학생‧교수등 3500여명으로 이뤄진 희망버스97대가 전국금속노동조합 유성기업지부 이정훈지회장이 154일째 고공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유성기업 영동공장을 지지 및 격려 방문했다.
이날 영동공장에서는 이정훈지회장의 부인 한영희씨의 편지글 낭독은 참가자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한영희씨는 ˂남편이 작년 10월 13일 고공농성을 시작했는데 그날이 결혼기념일이었다˃며 ˂남편이 철탑에 오른지 어연 다섯 달을 훌쩍 넘겼다˃고 말했다.
▲편지를 낭독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한영희씨
또 <밤에 잠 좀 자게 해달라'고 했다는 이유만으로 회사를 위해 일해 온 노동자를 두들겨 패서 쫓아낸 유시영사장이 원망스럽다>고 말했다.
한씨는 <27명의 조합원이 부당해고 판정을 받고 복귀했지만 삼개월 만에 또 해고됐다>며 <이에 반해 불법을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는 유시영사장을 보고 법과 정의가 통하지 않는 사회에 절망했다>고 토로하며 <대통령까지 나서 남편과 유성기업 노동자를 귀족노동자로 몰 때는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고 밝혔다.
이어 <남편은 입사 후 27년 동안 동료들과 함께 응원하고 격려하며 일하고 싶은 공장, 인간다운 삶을 위해 일해왔다>며 <민주노조를 지킬 수 있게 함께 해주세요>라고 호소했다.
영동공장집회는 참가자들의 희망돌탑쌓기 및 소망이 담긴 깃발을 철탑위로 게양하는 행사를 끝으로 마무리 됐으며 희망버스참가자들은 다시 버스에 오른 후 유성기업 아산공장으로 향했다.
다음은 한영희씨의 편지글 녹취전문이다.
저는 154일째 철탑위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이정훈 지회장의 아내 한영희 입니다. 무슨 말로 시작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제 남편과 노조를 응원하기 위해 오셨다는게 좋으면서도 막상 뭔가를 이야기하려니 떨리기만 할뿐입니다. 제 남편 이정훈 지회장은 작년 10월 13일 철탑농성을 시작했습니다. 그 날은 우리의 결혼기념일이기도 합니다. 전날 밤 할 말이 있다기에 늘 노조일로 바쁜 사람이 그래도 결혼기념일은 기억하는구나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기념일도 모르고 날짜를 잡았다며 철탑농성을 하겠다고 하더군요. 서운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하는 일이 지금까지 옳다고 생각해왔고 유시영사장의 잘못된 행동과 리더로서 자질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달이면 되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잘만 끝나면 한 달도 안돼서 내려 올 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섯 달이 훌쩍 넘었습니다. 지금은 그저 건강하게만 있기를 바랄뿐입니다.
2011년 5월 18일 회사에서 공장을 폐쇄하고 용역깡패를 투입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기 가 막혔습니다. 수 십 년을 일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나 싶어서 유시영사장이 원망스럽고 청춘을 다 바쳐서 일한 남편과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두들겨 맞으며 공장에서 쫓겨났다고 하니 두려움도 있었지만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직장폐쇄가 된 후 남편은 해고통지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해 더운 여름을 비닐하우스에서 보냈습니다. 어느 날 아이들과 함께 아산공장 앞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남편을 만나러 갔는데 가뜩이나 마른사람이 정말 더 삐쩍 말라 환히 웃는데, 차마 그 앞에서 웃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통령이 나서서 유성투쟁을 두고 고액임금을 받는 노동자라며 투쟁을 비난하고 나설 때면 피가 거꾸로 솟구치기도 했습니다. 당연한 권리를 이야기해도 이렇게 비난을 받을 수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쇠파이프에 두들겨 맞는데도 자동차로 사람들을 치고, 살인적인 행위를 했는데도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노동자가 아니라 경영진인데 대통령이 나서서 노동자를 비난하는 이 사회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래서인지 남편이 노조를 지키겠다고 하는 모습에 나쁜 소리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원만하게 해결되기를 바랄 뿐 입니다. 제 남편과 유성조합원 스물일곱명이 부당해고를 당했습니다. 회사에 복귀했지만 삼개월 만에 다시 해고를 당했습니다. 그걸 보니 유성기업은 법도 필요 없구나 싶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빽을 가지고 있길래 불법을 저질러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법으로 복직판결을 받아내어도 또 해고를 시키는 겁니까? 법도, 양심도, 정의도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 사회라는 생각에 노동자로 사는 게 참 힘겹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유성희망버스의 구호가 <힘내라 민주노조!> 라고 들었습니다. 제 남편과 유성지회 분들이 지키고 싶은게 저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 . 생각해보면 남편은 늘 노조간부였습니다. 1991년 부천에 있던 유성기업 공장에 공권력이 투입 됐을 때도, 1993년 영동공장에 내려와 노조을 세울 때도, 1996년 총파업을 하던 때도 그는 가족에게 유성기업 다니는 아빠 ‧ 남편이기보다 유성기업 노동조합간부였습니다.
유성기업에 1987년에 입사를 했으니 27년째입니다. 27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노조활동을 했던 것이 바로 민주노조 때문이었다고 라고 생각하니 지난세월의 기억들이 주마등 처럼 흘러갑니다.
1993년 처음으로 영동으로 내려 왔을 때 남편이 받는 월급은 16만원이었습니다. 당시 남편동료들이 받는 월급에 절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노조 일 한다고 툭 하면 결근과 조퇴를 해서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 때 딸아이가 태어났는데 월급봉투를 받고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남편은 나중에 제가 우는 것을 보고 '노조활동을 그만해야겠다.’ 고 생각했던 고백을 하더군요. 하지만 남편은 노조활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996년 총파업 때는 수배생활을 해서 애를 태우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정말 그만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차마 그 말을 꺼낼 수 가 없었습니다. 남편에게는 민주노조가 청춘을 바쳐 지킨 가장 소중한 것 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단 제 남편 뿐이겠습니까. . . 유성지업에 많은 분들의 남편과 같이 살아왔을 겁니다. 다른 노동조합에도 많이 계시겠지요. . . 저는 노동조합을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제 남편과 유성조합이 지키고 싶은 것 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습니다.
제 남편과 유성조합원들은 해고당한 동료들을 지키고 싶은 겁니다. 서로가 응원하고 격려하면서 일 할 수 있는 공장을 지키고 싶은 겁니다. 비록 자신은 인간다운 삶을 살 지 못하지만 동료들의 인간다운 삶을 지키고 싶은 겁니다.
저는 그게 민주노조라고 생각합니다. 희망버스를 타고 오신 여러분들, 우리도 지키고 싶은게 그런 뜻이겠지요?
남편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내 사랑 민주노조‘라고 하더군요. 민주노조를 지킬수있게 함께 해주십시오. 이렇게 나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