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끝나지 않은 역사

21세기대학뉴스 2018.05.31 00:10 조회 수 : 353

끝나지 않은 역사
5.18광주민중항쟁 역사기행문

매년 오월이 오면 80년 광주항쟁에 대해 이야기 듣는 분위기에 익숙해있었다. 스물 두 해를 광주에서 태어나고 자라왔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지겨움이라는 표상이 떠올랐다. 영화 <화려한 휴가>, <택시운전사>가 흥행해도 1980년 5월을 박제화하고 회상하는 주제는 못내 지겨움으로 느껴졌다. 나에게 있어 광주민중항쟁은 자랑스럽지만 시간이 너무 지나 가치를 잃어버린 할아버지의 낡은 훈장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보학생연대에서 주최한 <광주민중항쟁 역사기행>에 참가하게 된 것은 선배의 소개와 권유가 있어서 였고 큰 기대감을 가지고 참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나에게 정말 신기했던 것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대학생들이 꽤 많았다는 것이었다. 광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가 지겹다고느낀 38년 전 역사를 전국 각지의 대학생들이 어떤 기대감을 가지고 찾아온 건지 궁금해졌다. 
 
기행은 옛전라남도도청앞에서 시작됐다. 1980년 당시 광주는 전라남도 광주군으로 편제되어 전라남도도청이 광주에 있었다고 한다. 현재 광주의 중심부인 이곳은 나에게 주말이면 친구들과 삼삼오오 자주 놀러가던 장소다. 지금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어 전시나 공연이 기획되고 진행되는 곳이다. 

옛전라남도도청에 서려있는 역사를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평소 가벼운 마음으로 놀러가던 곳에서 역사 기행을 시작하려니 왠지 어색하고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도청앞 광장에 있는 시계탑에서 다른 지역에서 온 대학생들을 만나 서로 인사를 나누고 대학생길라잡이가 준비한 설명을 들으며, 옛전라남도도청 광주항쟁 최후격전지에 들어갔다. 

역사의 현장이 조금이라도 보존되어 있을 거라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광주항쟁 최후격전지라는 곳이 흡사 미술관과 같은 모습으로 탈바꿈 되어 있는 모습에 놀랐고, 이에 기행에 함께한 우리는 분노를 금치 못했다. 

최후격전지앞에는 옛전라남도도청 복원을 요구하는 전남도청 복원을 위한 범시도민대책위농성장이 있는데 우리는 대학생길라잡이의 설명을 들으며 농성장으로 이동했다. 역사의 현장을 복원하라며 농성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나니, 역사에 관심 갖지 않고 생각 없이 지나다녔던 내 모습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럽다는 생각은 기행에 참여하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금남로와 전일빌딩, 옛MBC방송국터를 지나며 대학생길라잡이의 설명을 듣는 동안, 내가 뜬금으로 알아오던 광주의 역사를 마주하고 실천하는 그들에게 고마움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기행은 1980년 당시 광주의 5월 영령이 잠들어 있는 묘역으로 이어졌다. 망월묘역이라고도 불리우는 이곳은 전국 각지의 대학에서 온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망월묘역에 방문했던 것은 초등학교 소풍 때였는데, 이곳에 함께하는 전국의 대학생들이 매년 5월이 되면 깃발을 들고 광주의 역사를 기억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망월동에 있는 묘역이라고 해서 약칭 망월묘역이라고도 하는 이곳은 신묘역과 원묘역으로 나뉘어 있다. 신묘역은 1980년 당시 희생자 또는 부상자들이 안장되어 있는 곳이고 원묘역은 광주항쟁의 정신을 계승해 활동한 민족민주열사와 노동열사들이 모셔져 있다.

신묘역에서는 계엄군의 손에 잔인하게 희생된 영혼들의 역사를 들을 때마다 올라오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어린아이, 중·고등학생, 장애인, 임산부 등 어느 계층 하나 가릴 것 없이 광주사람이라는 이유로 총, 칼을 휘둘렀던 그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분노는 원묘역으로 가는 내내 이어졌다. 광주에서 평생 살아왔지만, 원묘역에 가보았던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원묘역에는 열사분들의 뜨거운 피가 잠들어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끝나지 않은 항쟁의 역사를 보았다. 아직도 죽음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잠들어 계시는 그분들을 뵈며, 오월이란 이미 오래 전 끝났던 지겨운 역사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 자신을 반성했다. 

<한번 살기 위해 타협과 우회의 길을 가기보단, 영원히 살기 위해 원칙과 정도의 길을 가겠소.> 내가 다니고 있는 광주대학교의 김준배열사가 했던 말이다. 나에게는 학교선배라는 호칭으로도 불리울 수 있는 그 역시 현재 망월동 원묘역에 잠들어 있다.

그는 1990년대 대학생을 대표하는 조직인 한국대학생총학생회연합(한총련) 투쟁국장으로 활동하면서 김영삼정권의 부정부패를 비판하는 시위 도중 쓰러져 숨진 조선대 류재을열사 장례투쟁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수배를 당했다고 한다.

그렇게 부당한 공권력의 추적을 피해 몸을 숨기다 김준배열사는 죽음을 맞이했다. 열사의 죽음에는 의문점이 많다. 2001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에 의하면 검거과정에서 검찰의 프락치공작, 구타 흔적 등의 불법행위가 드러났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준배열사의 사건은 제대로 조사조차 되지 않은 채 마무리됐다.

1980년 5.18, 그리고 38년이 지났다.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달라진 척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직 망월동에는 김준배열사와 같이 죽음의 진상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영혼들이 잠들지 못하고 있다. 

이번 기행에서 내가 배운 가장 큰 가치는 지나간 역사를 원망하고 분노하는데 그쳐서는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80년 광주항쟁의 역사가 끝나지 않았음을 인식해야 하며, 잊지 않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지식을 행동으로 옮겨 실천해야 한다. 생을 위해 타협과 우회의 길을 가지 않고, 더 큰 가치를 위해 원칙과 정도의 길을 선택했던 열사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 그것이 바로 가장 큰 실천이며, 행동이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17학번 배송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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