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터사이클 다이어리 - 여행이 체 게바라에게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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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월터 셀러스(Walter Salles)

제작: 마이클 노직(Micheal Nozik), 카렌 텐크호프(Karen Tenkhoff), 에드가르드 테넨바움(Edgard Tenenbaum)

각본: 조세 리베라(Jose Livera)

촬영: 에릭 고띠에(Eric Gautier)

기획: 카를로스 콘티(Carlos Conti)

편집: 다니엘 레젠데(Daniel Rezende)

음악: 구스타보 산타달라(Gustavo Santadalla)

음향: 장 클라우드 브리송(Jean-Claude Brisson)

출연: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Gael Garcia Bernal) / 로드리고 드 라 세르나(Rodrigo de la Serna) / 미아 마에스트로(Mia Maestro)

제작연도: 2004년

상영시간: 126분

국가: 미국, 독일, 영국, 아르헨티나


“푸세(체 게바라의 애칭), 돌아와!” 24번째 생일을 맞은 게바라가 파티 도중 강물에 뛰어들었다. 어느 누구도 헤엄쳐 건넌 적이 없는 강이다. 물살도 만만찮은데다가 강폭의 길이도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친구 알베르토는 천식을 앓고 있는 게바라가 무모한 짓을 한다고 생각했다. 장난이길 바라면서 자꾸 돌아오라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게바라는 멈추지 않고 팔을 내젖는다. 건너편에서는 시끄러운 소동에 잠을 깬 나환자들이 손에 땀을 쥐며 그를 응원한다. 여행의 막바지. 며칠 후면 그리운 가족의 품에 안길 게바라가 즐거운 생일날 목숨을 걸고 강을 건너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이번 여행을 통해 무엇을 느꼈기에 자신의 생일, 자신의 목숨을 차별받는 나환자들에게 기꺼이 바치려 하는가?


식당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어느 뚱뚱한 늙은이처럼 살다가 죽는 게 싫어서, 적당히 의사가 되어 그럭저럭 먹고 사는 게 싫어서 체 게바라는 의대 졸업을 미루고 친구 알베르토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목표는 남미 대륙 전체, 수단은 모터사이클 ‘포데로사 Ⅱ’ 한 대, 젊은 혈기를 담보로 무모하게 감행한 이 도발적 여행의 종착적은 애초의 목적지 칠레를 뛰어넘어 쿠바와 아프리카를 경유하여 볼리비아에게까지 이어지게 된다.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체 게바라의 이 긴 인생여정의 출발점이 된 대륙여행을 그의 일기장에 근거하여 차분히 그려내고 있다.


나이 서른을 앞둔 친구 알베르토, 화학을 전공하고 병원에 일자리를 구하기 직전 그는 그의 서른 번째 생일을 독특하게 기념하고 싶어 한다. 부조리하고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의구심과 진리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던 23살의 게바라는 알베르토와 의기투합하여 대륙횡단 여행을 결심한다. 천식을 앓고 있는 게바라의 건강을 우려하는 가족들을 뒤로 하고 두 청년은 유쾌하게 출발하지만 무모한 여행인 만큼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난관을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호기롭게 포데로사의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아르헨티나의 코르도바를 출발하여 남미대륙을 크게 돌아 산파블로의 나환자촌에 이르는 동안 게바라와 알베르토는 ‘주식회사의 횡포’와 민중들의 처참한 현실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분노를 느끼고, 현재 그들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에 ‘무기력을 느낀’ 그들의 의식은 점점 발전하게 된다. 새로운 인식과 진실한 자기 총화를 거친 그들은 대륙여행의 마지막 여정을 나환자촌에서의 봉사활동으로 마감하게 된다. 짧지 않은 여행을 통해 낭만가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어느새 혁명가 체 게바라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체 게바라의 혁명정신의 기원을 찾아가는 이 영화는 진보적 감독 월터 살레스가 올해 새롭게 제작해 부산국제영화제에 내놓은 진보적 사실주의 영화이다. 게바라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만큼 그의 생애를 영화화하겠다는 생각은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다. 자칫 잘못하면 다들 알고 있는 내용의 진부한 영화로 치부되거나 존경받는 혁명영웅의 사상적 풍모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앙역>(1998)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감독답게 이 부담스러운 작업을 무난히 소화해냈다. 기록영화 제작자답게 방대한 이야기를 맵시있게 요약하며 고비고비 인상적으로 처리했다.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서 인물성격의 발전과정을 중심으로 치밀하게 조직된 사건선과 감정선에 ‘민중의 삶을 체현하는 속에서 참된 혁명가가 태어난다’는 영화의 종자가 잘 형상화되어 있다. 그저 이론으로만 알고 있던 불합리한 사회구조와 낭만적으로 공상하던 혁명에 대한 게바라의 인식이 모터사이클 여행 과정에서 만나는 구체적 민중들과의 관계 속에서 점차 혁명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모터사이클 정비소에서 만난 한 정비공의 어머니를 진찰하는 과정에서 게바라는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되돌아보게 된다. 입으로만 떠들던 민중에 대한 헌신이 얼마나 공허한 말이었는지, 그리고 현재의 자신으로는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길에서 만나 두 공산주의자 부부와의 대화와 광산에서 노동자들을 노예 다르듯 하는 관리인과의 갈등, 땅 주인에게 농토를 강탈당한 원주민 농부와의 대화는 게바라의 인식을 불합리한 세상에 대한 분노와 ‘총 없이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데까지 진전시키는 밑거름이 된다. 이처럼 민중들의 구체적 현실에 대한 다양한 체험들이 그에게 혁명의 필요성에 대한 감성적 인식을 심어준다면, 나병원 원장의 배려로 탐독하게 되는 다양한 혁명서적들은 그에게 혁명의 합법칙성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심어준다. 이를 통해 게바라는 ‘각 나라마다 혁명은 독창적인 방법으로 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인식하게 된다.


감독은 이러한 그의 인식의 발전을 나환자촌을 향하는 배 위의 장면을 통해서 새롭게 총화해주고 있다. 도박판이 벌어지는 부유한 백이전용 여객선의 후미에서 끈으로 이어져 따라오는 남루한 원주민전용 여객선을 내려다보는 게바라의 눈빛은 이전의 눈빛이 아니다. 좁고 지저분한 갑판 위에 여기저기 늘어져 있는 가난한 원주민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온통 깊은 연민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장면은 영화 전반부에 게바라의 목소리로 읊어지는 나레이션 ‘난 내가 아니다. 과거와 같은 나는 없다.’ 라는 고백과 조응하며 전혀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게바라의 앞날을 예고해준다.


새로운 인식은 새로운 실천을 낳게 된다. 나환자촌에 도착한 게바라와 알베르토는 보수적인 원장수녀의 원칙을 무시하고 맨손으로 나환자들과 악수를 한다. 팔 수술을 거부하는 소녀에게 자신의 솔직한 내면을 보여주며 설득하고, 집을 같이 짓거나 몸을 부딪치며 함께 축구를 하다. 그들의 진심어린 헌신에 나환자들은 사랑과 신뢰로 화답한다. 미사를 참석하지 않는 사람에게 식사를 주지 않는 원장수녀의 원칙을 어기면서 굶고 있는 두 사람에게 음식을 훔쳐다 주기도 하고, 봉사활동을 마치고 떠나는 그들에게 훌륭한 뗏목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이야기는 절정에 이르러, 24번째 생일을 맞이한 게바라는 수녀들과 병원관계자들이 마련해 준 생일잔치를 뒤로 하고 목숨을 걸고 강을 헤엄쳐 건너편의 나환자들에게 간다. 나환자들은 환호로 그를 맞이해주며 그에게 평생 잊지 못할 생일잔치를 벌여준다. 이처럼 세밀하게 조직된 사건선과 감정선은 혁명가로 전화되어 가는 게바라의 성격변화의 합법칙적인 근거로서 작용하게 된다.


감독은 인물의 성격을 묘사하는 데에서도 치밀성을 보이고 있다. 정직한 성격의 게바라와 능청스럽고 익살스러운 성격의 알베르토를 효과적으로 그리기 위해 두 인물의 행동과 대사를 서로 대비시킨다. 초반 각각 여행 가방을 쌀 때 꼼꼼하게 점검하며 짐을 싸는 게바라와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가방에 때려 넣는 알베르토의 행동, 잠자리를 얻기 위해 집주인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진실만을 말하려는 게바라와 적당히 거짓말을 섞으려는 알베르토의 다툼, 춤을 못 추는 게바라와 숱한 여성들과 언제든지 즐겁게 춤을 출 준비가 되어있는 알베르토의 행동이 대비되면서 두 인물의 성격은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게바라의 애인 치치나의 돈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두 사람의 성격대비는 치밀하게 조직되어 있다.


영상편집도 짜임새가 있다. 모터사이클의 이동에 따라 그 배경으로 펼쳐지는 남미대륙의 아름다운 자연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풍부한 감성을 불어넣어 주고, 스페인 식민지배로 파괴된 고대문화유적과 원주민들의 생활은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를 일으킨다. 전환적 계기 대마다 마치 흑백사진처럼 편집된 장면들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면서 화면 안에서 관중들을 바라보고 있는 인물들의 순박함과 진실성, 그리고 적대계급에 대한 내재된 분노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준다. 이러한 편집들은 게바라의 성격형성과정에도 복무한다. 대륙의 자연풍광이 그에게 대륙에 대한 사랑을 심어 준다면, 흑백으로 처리된 원주민들의 모습은 그에게 민중에 대한 사랑을 심어주게 된다.


영화는 여행 이후 두 인물의 삶이 어떻게 변모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 후 쿠바에서 살고 있는 현재의 알베르토의 얼굴을 확대하며 마무리한다. 가만히 관객들을 응시하는 늙은 알베르토의 시선은 새로운 인생의 시원을 열어준 두 사람의 풍부한 여행과 이후 그들의 삶의 폭과 깊이를 찬찬히 말해주고 있다. 이제 게바라는 가고 없지만 관객들은 알베르토의 얼굴에서 게바라의 얼굴을 보게 되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전하는 게바라의 음석을 듣게 된다. ‘당신은 지금 어떤 여행을 떠날 것인가?’

정형기

월간COREA 2004년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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