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노동자가 무엇인지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어린 시절, 노동은 고달프고 가난하고, 대접받지 못하는 인생을 설명하는 말이었다. 장래희망을 적어내라는 선생님에 말에 의사, 디자이너, 경찰, 우주비행사 같은 직업을 쓰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면 노동자는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아이들에게 그 직업들이 바로 노동자이며, 우리들은 대부분 노동자로 살아갈 것이라고 말해준 사람은 없었다. 절대다수인 노동자집단이 따돌림 당하고, 탄압받는 이상한 나라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 나라를 가득 채운 소금꽃나무들은 먹고사는 것 이외의 가치를 고민하지 못하도록 억눌리며, 지금도 바쁜 발걸음을 옮긴다.
노동자라는 이름을 잃으면, 뒤에 따르는 근로기준법, 노동인권, 그리고 인간다운 삶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것을 되찾는 일은 쉽지 않겠지만, 다행히 그 여정을 도와줄 사람들이 있다. 평생 노동운동에 몸 바친 투사들. 발자취를 눈으로 따라 걸어보는 것만으로도 삶이 뒤흔들리는 인생들이 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특히 오랫동안 응시하고 들여다본 풍경들이 무엇인지 알아야한다. 그러고 나면 그들이 가슴 아파 했음직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예전처럼 무심하게 지나칠 수 없게 된다. 그런 시선을 배우고 싶은 인생들이 있다.
김진숙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2011년이었다. 한진중공업이 400명을 정리해고 했을 때, 거기에 맞서 크레인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시작한 김진숙은 309일만에 현진중공업과의 투쟁에서 승리하고 다시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소금꽃나무>는 신문에서 앞뒤를 잘라 옮겨놓은 김진숙의 투쟁에 문맥을 더해준다. 18살에 봉재공장에서 시다로 일하면서 노동자생활을 시작했고, 21살에 조선소의 유일한 여성용접사가 되었다. 5년을 용접사로 살다 단단히 썩어버린 어용노조의 현실을 알게 되고, 민주노조를 만들어보려다 해고되었다. 그후 30년을 노동운동가로 살아온 김진숙이 전국을 누비며 만난 사람들, 먼저 간 동지들의 추모사, 곳곳에서 벌어지는 투쟁의 현장은 <소금꽃나무>에서 그녀만의 언어로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나무는 땅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지만 그 모습 그대로 굳어버리지는 않는다. 매년 반복되는 겨울추위에 무뎌지는 일 없이 잎을 떨구고 추위를 견딘다. 그러다 봄이 오면 언제 겨울이었냐는 듯 새잎을 내밀 것이다. 김진숙은 수없이 불어오는 겨울바람을 단 한 번도 소홀히 넘기지 않는 나무를 닮았다. 20여년을 한결같이 투쟁해온 그녀의 성품이 그렇고, 세상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그렇다.
노동자라는 단어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 많은 청년들도 스스로를 알바생일지언정 노동자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과연 노동자를 대신할 수 있는 다른 이름이 있을까? 세상을 만들어온 사람들, 간호사, 용접공, 승무원, 운전사, 교사, 연주자, 세상 모든 직업군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이름. 노동자는 <사람>이라는 단어만큼이나 폭넓은 공동체를 가지고 있다.
내가 노동자임을 깨닫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공동체에 합류하는 첫걸음이다. 그 연대의 사슬이 단단해질수록 우리는 우리를 지킬 수 있다. 그러면 용기 있는 동료가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비극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가 잡혀가고, 싸우고, 쫓기고, 죽어가는 일이 일상처럼 이어지는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카프카의 말대로 책은 우리 안에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 <소금꽃나무>가 더 많은 사람들의 얼어버린 바다를 깨부수고,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아줄 것이라 믿는다. 김진숙이 크레인에 올라가게 한 것은 결국 그녀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부숴준 <전태일 평전>이라는 도끼였듯이 말이다.
강한나객원기자